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3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3
다시 서울.
우리가 새로운 터를 잡은 곳은, 다시 서울이었다. 성북구 정릉. 국민대학교와 가까운 주택단지. 그곳에는 아파트보다는 개인 주택들이 많았다. 새로 이사를 간 곳은 내가 어릴 적 살던 단독주택과는 조금 달랐는데, 높은 문과 마당이 있긴 했지만 3층 건물이었고, 각 층에는 다른 가족들이 살았다. 일종의 빌라였지만 요즘의 빌라보다는 세대수도 작고, 조금 더 고급이었는데 2층에는 주인집이, 3층에는 우리 가족이 살았다. 방은 세 개 화장실은 한 개. 독립된 주방과 거실이 있고, 거실에 연결된 문을 열면 널찍한 테라스가 나왔다. 테라스에는 신기하게도 연두색 테니스 공이 예닐곱 개씩 굴러 다녔다. 근처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잘못 친 공들이 숱하게 넘어온 것이었다. 겁 많은 나는 언젠가 날아온 공에 맞지는 않을까 노심초사였는데, 신기하게도 공은 사람이 없을 때만 날아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집은 아주 많은 것들이 목재로 지어져 있었다. 마루는 요즘 찾아볼 수 있는 일자형 원목 또는 원목을 흉내 낸 마루가 아니라, 각자 문양이 조금씩 다른 정방형의 목재였는데, 왁스질을 했는지 어쨌는지 반짝반짝했다. 지금에서 찾아보려 해도, 그것을 정확히 지칭하는 명칭을 몰라 원목 타일, 정도로 기억하려 한다. 벽면은 체리목 루바, 천장도 네모진 원목 타일들로 되어있었고 거실에는 찰랑이는 크리스털들이 주렁주렁 엮인 샹들리에까지 걸려 있었다.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구옥'이라며 등장하는 집들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공간. 하루에 한 번 올려다볼까 말까 한 천장에 웬 공을 이렇게 들였는지. 이 집을 처음 지었던 건축주는 어지간히 취향이 고고하고, 씀씀이가 시원했던 것 같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돈깨나 있으면서 고급 취향을 가진 주인이 단독으로 3층 건물을 사용하려고 지었다가, 살림이 기울어서였는지 식구가 줄어서였는지 한층 한층 세를 주게 된 것이겠지. 때문에 세 들어 사는 사람 치고는 고상한 집에서, 또다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갓 초등학교 4학년으로 세 들어 산다는 개념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엄마가 2층 집을 '주인집'이라고 언급했으므로, 이 집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 집 역시 약간의 언덕 위에 위치해있었고, 아파트가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3층 우리 집에 가려면 적잖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놀이터라곤 주변에 찾아볼 수 없었고, 언덕이 많은 성북구 특성상, 또다시 언덕배기 꼭대기에 위치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다시 터를 잡은 이 곳은, 아파트가 별로 없었다. 때문에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기보다는 학교 운동장에 남아 시간을 더 보내거나, 서로의 집을 오가며 또래집단을 형성했다. 덕풍동이라는 어디 먼 동네에서 왔지만, 나는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이 근방에서 나왔으므로, 텃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심지어 몇몇 유치원 동창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내가 다녔던 유치원은, 지휘자 금난새의 모친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살던 동네에서 꽤나 평판이 좋은 곳이었는데, 생각난 김에 찾아보니 2016년에 폐업을 하였다. 이 유치원의 졸업생들은 사립초등학교에 많이 진학했고, 이 언덕배기 국립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나 포함해 몇 없었다. 기억 속에 잊혀진 금잔디 친구 몇몇은 기꺼이 나를 기억하고, 하굣길 정글짐 놀이에 끼워주었다. 잦은 거주지의 변화는 나의 생존력과 사교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박세리다.
아빠와 엄마는 새벽마다 TV 앞에 앉아서 박세리의 경기를 봤다. 아빠는 나와 다르게 다방면의 스포츠에 능했는데, 그중에서도 골프를 가장 좋아했다. 애정만큼 실력도 출중했던지, 각종 동호회 등에서 가져온 트로피를 거실 한켠에 줄 세우곤 했다. 내가 볼 땐 골프 역시 볼링과 마찬가지로 큰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종목 중에 하나였는데, 너른 잔디밭에서 채를 휘둘러 공을 보내는 것도 대체 어느 부분에서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파 5홀에서 4번 만에 공을 넣으면 박수를 받았고, 3번 만에 넣으면 엄청난 환호가 일었다. 공은 시원하게 날아가기도, 해저드라 불리는 물웅덩이에 처박히는 일도 있었다. 갤러리라 불리는 사람들은 선수들이 치는 공을 따라 무리 지어 따라다니고, 내리쬐는 태양을 함께 맞았다. 관중석에 앉아 스낵을 즐기고, 치어리더의 흥을 감상하는 여타 구기종목의 관중과는 달리, 갤러리들은 순례길이라도 나선 듯, 땡볕에 서서 걷고 또 걸었다. 행여 선수에게 방해되는 소리라도 낼까, 조심스레 숨을 죽이다 공이 하늘로 솟으면 박수갈채를 보내는, 교양 있는 관중들. TV 앞에 엄마 아빠도 함께 숨을 죽이고, 영웅 박세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경기를 밤새 보고, 또 보았다.
박세리 붐으로 시장성을 예측한 것인지, 혹은 그저 꼭 이루고픈 꿈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빠가 서울에서 새로 시작한 사업은 골프연습장이었다. 거대한 그물이 걸린 큰 곳은 아니고, 그래도 동네에서 꽤 신식 건물 지하에 있는 스크린골프연습장이었다. 요즘처럼 화려한 소프트웨어로 실감 나게 즐기는 것은 아니었고, 채로 톡 건드려 버튼을 누르면 공이 놓이고, 그 공을 깃발이 그려진 천막 스크린에 맞추며 스스로 연습을 하는 공간이었다. 아이언과 드라이버를 연습할 수 있는 구역이 나뉘에 있었고, 약간의 경사로와 결이 다른 인공잔디들이 깔린 퍼터 전용 구역도 있었다. 작은 매점과 라커룸, 사무실 등이 제법 갖추어진 골프연습장. 손님들의 폼을 봐주고 지도를 하는 선생님도 한 명 고용했다. 사람들은 그를 '최프로'라고 부르고, 아빠를 '김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사모님'이 되었다. 개업 초기에는 인근에서 사업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와서 레슨을 받았다. '최프로'가 바쁠 때면 '김 사장님'도 레슨을 했는데, 이런 성업은 채 몇 달이 가지 않았다.
자영업이라는 것은, 특히 불경기에 고급 스포츠 연습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인공잔디, 자동으로 공을 놓아주는 기계, 연습용 채부터 자판기까지 수천만 원의 인테리어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신축 건물의 한 층에 해당하는 임대료와 직원의 월급에, 각종 공과금과 부대비용들까지. 이런 돈들을 하염없이 채워 넣어도, 독은 차오르지 않고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독 안에 든 김 사장님 가족. 그것이 우리였다. 처음에는 카운터와 매점 업무를 보던 언니가 자리를 뜨고, 우리 집 사모님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최프로 차례였다. 최프로 대신 김 사장님이 모든 레슨을 하기 시작했고, 하루에 네-다섯 타임씩 있던 레슨은 차차 줄어, 일주일에 두어 번 할까 말까 했다. 어느 날은 김 사장님이 나를 불러 기이하게 짧은 아이언을 건넸다. 내 키에 맞춰 특별히 만든 채라고 했다. 손잡이 고무에 작게 분홍 띠가 둘러있었다. 퍼터 옆, 구석진 자리는 내 전용석이었다. 김 사장님은 나에게 채를 쥐는 법, 다리를 살짝 구부리고 공을 응시하는 법, 채를 휘두르고 조준하는 법등을 가르쳤다. 이 밑 빠진 독에 하염없이 물을 채우면서, 어쩌면 이 아이가 박세리처럼, 집안을 일으키기라도 기대했던 것일까? 아니면 텅 빈 연습장에 하릴없이 앉아 있느니 자가 레슨이라도 하며 하루를 견뎌야만 했던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관심 없었다. 나는 그저 집에서 투니버스나 보고, 학교 가는 길 돼지 슈퍼에서 맥주 사탕이나 두어 개 사는 편이 좋았다. 이런 공을 쳐내 봤자, 고되기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가 찾아왔다. 김 사장님, 사모님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우리는 또 이삿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