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따라
이건 또 무슨 소리. 우울증이라니.
이상했다. 나는 전혀 죽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죽을까봐 무서워 불안 장애가 생기지 않았나. 그리고 슬프거나 우울하지도 않았다. 물론 지금 내 상황에 대해 비관하긴 했었다. 그런데 내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한번, 아니었나? 라는 물음이 들었다.
우울증은 슬픈 감정을 느끼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무기력, 진흙을 머금은 듯 행동이 느려지는 것에서 출발해 공허함, 불면증 등으로 나타나는 게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우울증의 이름이 된 우울함도 사실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전과 같이 다시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닫는 무심함 말이다. 나는 충분히 우울했다.
그래, 분명 나는 우울했다. 근데 원인을 찾기 힘들었다. 분명 답은 내 안에 있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도 모자라서 달도 안 뜬 밤이라 막연했다. 그 가운데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눈물이 나올 때 슬펐다. 내 안에 가득 찬 우물이 넘실대다 한순간 흘러넘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우는 내 자신을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그건 유레카였다. 내가 여지껏 참아온 눈물을 이제서야 쏟아내는 일이었다. 그건 치유였고 내가 울지 못했던, 그리고 앞서 그렇게 눈물이 차곡차곡 모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눈물을 참는 게 습관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순간 슬픈 영화를 봐도 목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것은 가족들 앞에서 더 심해졌다.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가족들은 울어도 나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물을 마시러 갔다. 괜히 농담을 던지고 더 웃었다. 눈물이 터지기까지 느껴지는 감정의 너울을 느끼는 게 어색했고 싫었다. 울면서 받는 관심도 어색했다. 그래서 꾹꾹 참았다.
십 몇년 간 내 안의 우물을 가득 채웠다. 물을 퍼올리는 도르래는 고장난 채 모아두기만 했으니 당연히 언젠가 넘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이었다. 지금이 우물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 지금 내가 불안하고 우울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을 울며 밤을 보냈다. 그 옆에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일년동안 내가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가만히 들어주고 나의 눈물을 달래주었다. 그간 말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꺼내는 일은 캄캄한 사막에서 랜턴이 되어주었다.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 살펴가며 원인의 바늘을 찾아갔다.
그 결과,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사연들이 모래 사막 위로 하나 둘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