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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Jul 10. 2024

매일 펼쳐지는
고사미 VS 사춘기 대전!

고사미와 사춘기가 매일같이 대치하는 우리 집, 사춘기의 압승이네요

"엄마, 나 이거 입고 가도 되지?"


시험기간인 둘째가 일요일 학원 직보(시험 전날 행해지는 '직전보강'의 줄임말로 학원가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다.)에 가면서 서랍에서 추리닝을 꺼내며 물었다.


'아, 언니 옷인데... 왜 하필 저 옷...?'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추리닝이 한 두벌도 아니고 괜찮겠지 하며 '끄덕' 하고 허락하고 말았다. 그 한 번의 끄덕이 몰고 올 나비효과는 생각지도 못한 채.


둘째가 학원으로 간 후, 첫째가 학원으로 가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알았다. 이게 바로 폭풍전야구나.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기분이 좋던 첫째였다. 사춘기 지난 후에 대화다운 대화를 못해보았는데 얼마 전부터 조금씩 대화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바로 전날, 첫째와 비로소 두 시간의 연속 대화가 가능했더랬다. 


그런데 어제의 웃음기 가득한 대화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아직 내 마음에 남아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이 서늘함은 뭐지...? 그래 어제의 훈기.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다. 겁 없이 언니의 옷을 입고 가라 허락했던 나의 용기는.


"엄마 내 추리닝 어딨어?"

"..."


이하 장면은 익히 상상할 수 있는 그 장면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지금은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기말고사 기간이다. 한주 정도의 시차로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들이 시험을 준비하는 시기. 작년에 둘째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는 자유학년제 덕분에 별 일이 없었는데 둘째가 중2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둘 다 시험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거다. 첫째는 고3이라 그렇다 치고 둘째는 생전 시험이라는 것을 처음 치러보는 중2라 그런지 아니면 사춘기의 궁극을 달리느라 그러는지 감정의 기복이 상상초월이다. 사소한 추리닝 하나에도 세계 3차 대전 버금가는 대전이 펼쳐지는 현재의 우리 집 풍경이다.


그런데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이런 일들을 내가 쓰는 이유는, 사실 이제는 별로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는 담대함이 나에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엄마도 엄마는 처음인지라 첫째가 사춘기의 동굴로 들어갔을 때부터 나의 조심스러운 가슴 졸임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를 겪는 방법은 아이마다 달라서 각자만의 방법으로 통과한다지만 유독 유리 같았던(지금 생각해 보니 유리 같다고 생각했던) 우리 첫째를 나는 건들지 못했었다. 일단 '대화거부형' 아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접근하고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섣불리 다가갔다간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니.  


남들보다 이른 중1부터 서서히 시작된 첫째의 사춘기가 '소통단절'의 시기를 거쳐 동굴에서 나오기까지 3년 반의 시간 동안, 나는 첫째의 방문 밖에서 살아온 느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슬쩍슬쩍 내 옆에서 말을 걸던 첫째가 어제는 급기야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는 거였다. 느닷없이 다가오는 첫째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딸과 함께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첫째의 고민은, 그러니까 반장으로서의 고달픔인데 그 고달픔이란 것이 기상천외했다. 아이는 결벽증을 갖고 있는 탓에 매일 교실을 청소한단다. 뿐만 아니라 칠판 닦는 것도 도맡아 하고. 하루종일 집보다 더 오래 있는 공간이 지저분한 것은 아이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다나. 자기가 편하자고 청소도 하고 칠판도 박박 닦아 놓는다는데 문제는 선생님이 자꾸 고맙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달콤한 간식을 너무 좋아하는 딸은 자주 간식을 가지고 다니는데 어차피 친구들한테 많이 나눠주게 되니 아예 한통씩 주전부리를 사서 종종 교실 앞에 간식통을 가져다 놓는단다. 그게 자기도 실컷 먹고 친구들도 편하게 먹는 일이라나.


"그런데 자꾸 선생님이 고맙대. 엄마 간식은 맛있고 행복한 거지 고마운 게 아니잖아. 고마운 건 투머치야. 하하하 흑흑흑!! 그리고 자꾸 선생님이 칠판 닦는 것도 칭찬하셔서 이제는 심지어 내가 안 했다고 잡아떼고 있어. 선생님이 고맙다고 하실 거 같으면 나 도망가 이제~~~아흐흑"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다 보니 상황이 너무 코믹하게 느껴졌는지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이야기하는 딸이다. 


그런데 이 기상천외한 상황을 보고 내가 놀랐던 건 나도 모르고 있었던 우리 첫째의 성격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특이하고 희한하고 재밌는 성격일 줄이야. 그나마 MBTI라는 것이 있어서 이해를 도왔지, 아니었음 무슨 말로 설명을 할까 싶을 만큼 나의 이해의 영역 밖에 있는 딸이었던 거다. 내가 그동안 키우건 누... 구...? 


딸의 말인즉슨, 고1 때까지는 자기도 자기의 정체성을 몰라 방황하던 반항기 충만하던 시절이었단다. 그 시절을 끝내고 나오니 자기의 성겨이 어떤 성격인지 알게 되었다는 딸에게서 제법 단단하게 여문 티가 났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착하게 잘 컸네... 하는 생각까지. 


나는 딸의 문 밖에서 서운하고 미안하고 안쓰러워하며 기다릴 동안, 딸은 차근차근 사춘기를 정리하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낸 거 같았다. 내가 딸을 바라보며 보낸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간 딸의 시간들이 뭐랄까... 고맙기도 하고 대견했다.


그렇게 훈훈한 기억이 남은 밤을 보낸 탓에 우리 집이 사춘기와 고사미의 전장터임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이 이야기의 끝은, 고사미가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진짜로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는 않았음) 동생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끝났다. 결과적으로 사춘기의 승! 고사미도 못 이기는 사춘기랄까.  


이쯤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갱년기로는 언감생심 사춘기와 고사미의 전쟁에 명함도 못 내민다는 것, 그리고 결국 사춘기를 지난 고사미도 사춘기를 이길 수는 없다는, 그만큼 사춘기 호르몬은 무섭다는 결론을 얻으며... 우리 둘째는 어떤 동굴을 통과하게 될까 내심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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