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제이 Jun 26. 2017

80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

2006년, 아들이 6살 때 있었던 에피소드. 


한 해를 시작하고 한 살의 나이를 더 먹게 되는 설날이다. 떡국을 안 먹어도 나이는 먹어야 한다. 
고소한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과일도 다양하게 먹고 평소보다 푸짐하고 기름진 상차림에 늘어나는 뱃살은 피할 수 없다. 
  
어김없이 돌아온 설 명절이다. 음식 장만이나 설거지 등 부엌일은 피하고 싶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과 반가운 얼굴을 보는 일은 기분 좋다.
  
설날 아침 상을 차리고 남편, 도련님, 아들 셋이서 차례상 앞에서 절을 올린다. 작년부터 아들도 함께 인사를 드린다. 아들이 언제 저리 컸나,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여섯 살, 호기심이 왕성한 주연인 궁금한 게 많다.
  
(주연) 엄마!  왜 상에 대고 절을 해?
(나) 어! 저기 상에 할아버지가 오셔서 맛있게 식사하시는 거야!
(주연) 할아버지가 어딨어?
(나) 착한 사람 눈에는 다 보이는데, 주연인 안 보여?  
(이럴 땐 뭐라 해야 는 걸까? 제례문화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주연) 어. 난 안 보이는데. 
  
 아빠와 삼촌을 따라 절을 한다. 그러다가 또 질문이 들어온다. 
  
(주연) 근데, 왜 이렇게 절을 많이 해?  이제 마지막이야?
(나) 아니. 한번 더 남았어.
(주연) 이제 진짜 마지막이지?
(나) 주연이 절할 때 소원 비는 거야? 속으로 소원 빌었어?
(주연) 아니. 알았어. 그럼. 소원 빌께

....
(주연) 엄마, 나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아?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나) (나도 덩달아 속삭인다) 아니, 무슨 소원인데?
(주연) 어어~,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 
(나) 푸하하.
  

할아버지가 식사하러 오시는 거라 했더니, 할아버지 오래 사시란다. 
할아버지가 주연이 얘기 들으셨으면 '허허! 고놈 참! '하셨을까?


나도 얼굴을 모르는 아버님이신데 말이다. 
오늘도 귀염둥이 주연이 때문에 웃는다.


------------------------------------------------------------------------------------------

훌쩍 키와 함께 자라 버린 아들은 이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젠 다 큰 어른의 모습이다. 아침잠이 많은데 명절엔 일찍 일어나 함께 인사를 드린다. 이제는 두 분께 절을 드린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끔 술도 한잔씩 올린다. 제례문화를 따로 설명을 해주진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학교에서 배웠으려나.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차리는 일, 그 앞에서 절을 올리는 일, 점점 이런 문화가 없어지는 분위기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잣대로 따지면 불필요한 문화일 수 있다. 그러나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이젠 익숙해져서 상차림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때가 되면 습관적으로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한다. 요즘은 내 마음 편하려고 지낸다. 먼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계시면 더 좋을 것도 같고, 그저 이쁘게 봐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79 좋아하는 치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