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소방서에서 처음 접했을 때부터, 초속 5cm는 나의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제대하고 나서도, 미국에서 혼자 살 때에도 6-7년 남짓한 시간 동안 초속 5cm를 틀어놓고 맥주나 와인을 한 잔씩 하는 것이 삶에 큰 위로를 줬다. 그 당시에는 '위로'라는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위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일어난 많은 변화 중 하나가 더 이상 쓸쓸한 감성의 예술을 찾아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에피톤 프로젝트부터 신카이 마코토까지, 쓸쓸함이라는 감정은 내가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 중에 하나였는데,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고 결혼이 임박했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다.
딱히 또 보고 싶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의 감정이 그리울 때가 있다.
"넌 항상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라고 친구가 말했을 때에도 나는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살고 있는 내가 만족스러웠다.
오늘 하이큐라는 만화책을 보는데, "포기할 수 있는 여유"라는 말이 등장했다.
"저 녀석들은 포기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달까요...?" 류의 전형적인 일본 소년만화 대사였는데, 약간 창피하지만 멋진 라인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쓸쓸한 감정을 애써 되살려가면서까지 그런 류의 예술을 접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상념에 잠길 수 있었던 때의 나는 쓸쓸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시절을 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는 쓸쓸함에 잠길 여유가 없는 것도 맞는 것 같다.
쓸쓸함에 잠길 여유가 없는 날 보면서 또 쓸쓸해지지만, 다시 또 그럴 여유가 없으니 쓸쓸하지 않다.
아마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간의 삶도 결국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 여유를 잃어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성숙"해지는 것 역시, 성숙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유를 잃어가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싸이월드가 아니라 브런치니까, 별로 내 타입은 아닌 말을 첨언하면서 글을 마무리하자면,
영화 초속 5cm에서는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cm라는 것에 빗대에서 인간관계의 소원해짐을 표현했다.
인간이 삶의 여유를 잃어가는 속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벚꽃이 흐드러진 석촌호수를 보고 있자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