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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a Dec 31. 2019

[단편] 나의 친구 모나미

내 가방 안에는 항상 모나미 볼펜이 들어있다.

모나미는 프랑스어로 Mon Ami로 나의 친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런던에서의 생활도 어느덧 4년 차.

이 사회에서 나는 모나미다. 몽블랑이 아닌 모나미.

한국에서 온 모나미.


그녀의 이름은 앨리스.

내가 짝사랑하는 여자이다.

짝사랑이라고는 해도 한 번 본 것이 다일뿐이지만.


앨리스라고 하면 백인의 금발 곱슬머리 여성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프랑스 릴에서 나고 자란 중국계 프랑스인인지라, 겉으로 보기엔 나와 다를 바 없는 동양인이다.

대화를 시작하면 프랑스 사람 특유의 입모양이나 표정 등이 도드라져서 중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앨리스를 알게 된 것은 6개월 전,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여느 때처럼 커피를 사서 올라가려고 하는데 누가 내 등을 쳐서 볼펜이 떨어졌다고 말해줬다.

그때 처음 알게 된 앨리스.

그때 떨어진 볼펜이 모나미.

서양에선 스몰 톡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모나미를 이용해서 대화를 시도했다가, 그녀가 프랑스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앨리스는 같은 빌딩 심지어 같은 층을 사용하는 신생 MCN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해서 그때 이후로 한 달에 한 번 있는 공유 오피스가 주최하는 해피아워에도 매번 참석해 봤지만 앨리스는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다시 앨리스를 만난다고 해도, 그녀가 날 좋아하게 될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무엇하나 어울리지를 않는다.


그녀는 루이비똥을 들고, 나는 투미 백팩을 멘다.

그녀는 핫 카푸치노를 마시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그녀는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나는 한국에서부터 5년 넘게 쓰고 있는 뿔테 안경을 낀다.

그녀는 프랑스인이고, 나는 한국인이다.

그녀는 몽블랑이고, 나는 모나미다.


그렇지만 속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품는 것 까지는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항상 찾고 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처음 만난 지 정확히 6개월 만에 그녀를 보았다.

회사에서 알게 된 유일한 한국인 동생이 알려준 작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녀가 옆에 온 것이다.

멋쩍게 인사하니 날 알아보는 듯 짧게, 그렇지만 반가운 것처럼, 인사를 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우고,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행복했다.

콧노래가 나올 뻔했지만 혹시 누가 볼까 참았다.

그녀의 손에 반지가 없었다.


담배를 피고 난 뒤 맑아진 정신 때문인지, 반지가 없다는 점에 행복했기 때문이었는지,

남은 오후는 일이 너무 잘 되었다. 오늘따라 영어도 잘 되는 것 같고, 좋은 피드백도 들었다.

이 기세를 몰아서 야근으로 그간 오래 끌어온 프로젝트를 일단락 지으려는 각오로 회사 앞에서 케밥을 사 오는데, 한국인 회사 동생이 앨리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 공기를 포착하려고 엄청 애쓰는 와중에 동생이 말을 걸면서 앨리스를 소개해준다.

그러자 앨리스가 우린 이미 구면이라고 말하며 아는 척을 해 주었다.


나는 일이 바쁘다고 말하고 오피스로 올라와서 동생에게 카톡을 해서 물어보니 그냥 오며 가며 알게 되었는데 같은 동양인이라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회사 근처에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이라면, 그녀의 라스트 네임을 알게 되었다.


Liu.

Alice Liu.


앨리스 리우란 이름도 예뻤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일도 너무 수월하게 완수했다.


오늘은 자기 전에 영화를 봐야겠다.

한국 사람과 중국 여자니까 만추를 봐야 하나?

그건 너무 우울한 스토리니까, 훈훈한 걸 봐야겠다.

접속이 좋겠다.

접속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구름에 가려져 있지만, 왠지 오늘은 달빛도 밝을 것만 같다.


런던의 겨울밤은 꽤 쌀쌀했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내 흥겨운 걸음걸이에 맞춰 가방 속의 모나미 펜들도 달그락달그락 리듬을 맞추는 것 같았다.

나의 친구 모나미가 그때 떨어져 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모나미!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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