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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Oct 22. 2023

박사과정생을 화나게 하는 방법

"워라밸 좋아?"라고 물어보기


 토요일 아침, 책상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글을 쓴다.


    사실 계획대로라면 개인적으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늦은 아침 시간대인 바로 지금, 페이퍼를 써야 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먹었다. 창문을 열고 선선한 가을의 아침 공기와 단풍을 가까이 두고 따뜻한 커피향이 방안을 채움을 만끽해 본다. 최근 꽤 오랫동안 소소한 즐거움과 충전의 시간을 희생했음을 인지했다.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도 제쳐놓고 일만 했다.



     박사 과정은 로딩이 정말 석사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무거운데, 그 안에서 워라밸도 찾아야 하고 셀프케어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해서 더 어렵다. 이 생활을 5-6년을 지속해야 하는데 업무량, 공부량을 줄여줄 리 만무하고 어떻게든 주어진 시간 안에 다 해내야 한다. 시간관리, 우선순위 설정, 자기와의 타협, 내려놓음, 셀프케어 이런 능력이 고루 필요하다.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은 번아웃 예방과 셀프케어가 정말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누가 "너는 어떻게 밸런스를 유지해?"라고 물어보면 혼자 버튼 잔뜩 눌려서 "못해!!!!!!! 못하고 있어!!!!!!!"라며 급발진을 한다. 인성이 파탄 나서 미안합니다.


    당장 눈앞에 해야 할 것이 쌓여있고, 데드라인이 켜켜이 버티고 있으니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웰빙과 휴식이다. 생각만큼 빠르게 일을 쳐내거나 끝내지 못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간다. 그런데 계속 일하고 있자니 갈수록 효율은 떨어지고 머리는 돌처럼 굳어 굴러가지도 않는다. 페이퍼가 안 써지거나 데이터 클리닝을 잘못하는 등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도 스트레스가 두 배 세 배가 된다. 또, 아침에 8시 경 등교하며 산 크로아상과 카푸치노를 오후 3시 반에야 겨우 앉아서 먹는 날도 있었다.


    이럴 때 용감하게 내려놓고 확 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늘 쉬면 내일 일이 두 배가 되는 압력 속에 쉼이 쉼이 아님을 느낀다. 균형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을 적당히 주면서 밸런스를 유지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화가 난다.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 날씨는 한없이 찬란하고 아름답다. 가을날의 캠퍼스는 또 얼마나 예쁜지 화가 날 지경이다. 그림의 떡이다, 정말. 위의 사진은 평일에 너어-무 피곤하고 몸뚱이가 10톤이 된 것 같은 날 도서관에서 10분 남짓 퍼져 쉬던 때다. 마음 같아서는 돗자리 들고 피크닉 가서 날 잡아잡솨-하고 햇볕 아래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쉬운 대로 도서관 창가 햇볕 아래서 망상 피크닉으로 대체했다. 현실은 지도 교수님이랑 하는 집단상담 시작 20분 전...... 조금 쉬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바로 올라갔다.


     이렇게 욕구와 전혀 반대의 일을 하는 순간에 혼자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한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 아무도 못 알아듣게 한국말로 " 하기 시잃다하~ 집에 가고 싶다 하~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이런 유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동료들이 콧노래를 부른다며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긍정적이라고 한다. 하-.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주말에도 바쁘기는 뭐 매한가지다. 월요일 오전 수업이 100% 토론 수업이라 읽을 자료를 안 읽어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있을 수밖에 없다. 정원이 9명 밖에 안되는지라 안 읽어가면 그렇게 티가 다 나서 다들 열심히 읽어온다.


   이것은 흡사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전쟁의 한 장면이다. 교수님(오크)은 요새 아래서 우레와 같은 돌덩이 질문을 퍼부으며 요새를 공격한다. 마지막 요새에 갇힌 학생들(호빗/인간)은 분주하게 방어하지만 쉽지가 않다. 가끔 어렵게 던진 질문 역공으로 기세의 반전을 꿈꾸지만, 그 질문은 역으로 다시 돌아와 요새를 공격할 뿐이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한 주를 시작한다.


     아무튼 이날은 수업 전날, 나른한 일요일 오후였다. 동기부여가 너-무 안되는데 읽기는 해야겠고, 하여 침대에 전기장판을 켜놓고(전기장판은 정말 사랑이다) 아이패드 거치대를 설치해놓고 누워서 읽었다. 휴식과 리딩을 동시에 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누워서 효율이 나겠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다 읽을 수 있었다. 앉아서 딴짓하며 시간을 보내느니 등 붙이고 편히 드러누워서 빨리빨리 읽는 게 나았다. 앞으로도 계속 애용할 예정이다.




    주말에는 그나마 잠옷을 입고 누워서 할 것을 하지만 평일은 사뭇 다른 바이브다. 평일 공강 시간에는 여지없이 모여서 자율 스터디를 한다. 바쁘고 힘든 때에 혼자서 앉아서 공부를 하려면 효율도 안 오르고 동기부여도 안되는데, 희한하게 동기들이랑 하면 기분도 효율도 훨씬 났다. 위의 사진은 도서관이고 아래 사진은 카페다. 그날그날 시간과 기분에 따라 장소를 바꿔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일까. 날 좋은 날은 하늘이 잘 보이는 도서관 자리에서 같이 공부한다. 학교 도서관이 그룹 스터디를 할 공간이 많은 것, 그거 하나는 정말 좋다.


    동기들이 다들 매우 학구적이라 같이 있으면 좋은 자극을 많이 받는다. 동기들이 인터넷에 없는 자료를 도서관에 요청해서 책을 쌓아두고 빨려 들어갈 듯이 읽으며 과제를 하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한 컷 남겼다.  각자 다 다른 공부나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모여서 하면 시너지 효과가 좋다. 서로 듣는 수업은 비슷비슷하지만, 전부 다른 랩이라 연구나 활동은 제각각이라 교류하면 꽤나 재미있고 유익하다. 또, 중간중간 신세한탄도 같이하고(사실 이게 메인이다) 토닥토닥하며 힘내고 그런 소소한 시간들이 소중하다.






    이날은 카페에서 같이 공부한 날이다. 다들 가을 날씨가 너무 좋고 놀러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낙엽이 가장 예쁜 카페에서 공부했다는 슬픈 썰이다. 우리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 사는 걸까 주저리주저리 한탄하며 각자 바쁘게 할 것을 했다는 후문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 고생을 자처했기에, 탓할 데도 없어 슬픈 영혼들이다.


   어제 심리치료 롤플레이 평가를 연습하기 위해 조별 모임을 했다. 서로서로 상담을 해주는 것처럼 시연을 하는 것인데, 내담자 역할을 할 때 일과 쉼의 균형을 잘 못 잡고 있어 어렵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균형은 잘 못 잡는다고 느낄 수 있지만 어쨌든 9주 차가 지날 동안 주어진 모든 것들에서 구멍 나지 않고 잘 하고 있음을 새로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조별 과제 시간을 이용하여 무료로 치유를 받고, 오늘 하루는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로 열어보았다.



     앞으로 마의 2주가 펼쳐질 전망이다. 향후 2주 안에 큰 페이퍼 4개, 작은 페이퍼 2개 도합 6개의 페이퍼와 30분짜리 프레젠테이션의 데드라인이 한 번에 몰려있다. 이 모든 과제들을 다 지나 살아버티고 나면 제대로 축하를 하려 한다.



그때까지 무사히 잘 버텨주기를 바라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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