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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신옥 Aug 14. 2022

손에 손 잡고

~ 폭우 속에 만난 천사들 ~

115년 만에 기록적인 물폭탄이었단다. 

‘우와!’ TV 화면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서울 한복판이 불과 몇 시간의 폭우로 저렇게 물바다가 되는가. 물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자동차 위에 올라가서 도로에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한 남성을 보며 모두들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해마다 폭우 속에서도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떠오르는 지난 일이다.

아직 자가용도 흔치 않고 휴대폰도 나오기 전 1990년대 어느 해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7시 30분 정도에 출근길에 나섰다. 조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우산을 챙겼지만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좌석 수가 많고 조금 더 빨리 간다는 좌석버스를 타고 광명시에서 서울로 출근길에 올랐다.           

 


 한 두 정거장을 갔는데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우산을 쓰고 간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 오길 잘했다고 안심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비는 세차게 버스 창문을 두드리며 쉴 새 없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몇 발짝 못 가고 쉬기를 거듭할 뿐이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섰으니 빨리 도착은 못 해도 지각은 하지 않으리라 불안을 잠재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최소한 반 정도는 왔을 시간에 버스는 아직 개봉동에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세상은 소리도 시야도 온통 폭우로 휩싸여 있었다. 버스를 탔을 때 7시 뉴스를 듣고 있었는데 8시 뉴스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합리화로 안심하려고 해도 자꾸 불안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버스 창밖은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버스가 개봉역 정류장에 왔을 때 지하철 운행이 멈추었다고 버스로 몰린 사람들이 무더기로 승차를 했다. 버스 안은 만원이고 버스를 더 타지 못한 사람들은 창문을 두드리며 아우성이었다. 운전기사님도 어쩔 수 없어서 문을 더 이상 열지 않고 있었다. 버스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사람들은 불안에 젖고 있었다.           

 


 어디까지 왔는지 밖을 분간할 수도 없는데 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9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 불안과 초조를 넘어서 모두들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저기에서 가끔 한숨 소리만 들릴뿐 기사님도 승객들도 이심전심 낭패감이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머릿속은 온통 학교 교실로 가 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선생님, 술렁이다 못해 난장판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누가 울고불고하지는 않는지, 옆반 선생님이라도 좀 와서 도와주고 있는지, 이 지각 상황을 교장 교감선생님은 어떻게 이해를 하실지…….           


 그때는 승용차 세상도 아니고 휴대폰도 나오기 전이라 공중전화 말고는 연락할 길이 없는데 모두 버스에 갇혔고 연락을 하려고 내렸다가는 다시 차를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버스에서 뉴스를 듣다 보니 지역에 따라 전화도 불통이라고 했다.          



 그렇게 버스 안에서 애를 태우며 오전 10시 뉴스까지 듣고도 좀 더 지나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난리가 났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학교는 조용했다. 운동장은 물에 잠겼고 급한 마음에 풍덩풍덩 물을 건너 교무실에 들어가니 교무실도 교장실도 텅 비었다. 모두들 출근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아직 오는 도중이기도 했다. 지각 사유를 보고할 대상도 없었다.           



 교실에 올라가니 아이들은 눈물 반 반가움 반 섞인 목소리로 “ 와, 선생님 오셨다.”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나도 울컥했다. 교사 부재의 교실에서 똑똑한 반장의 리더십으로 아이들은 의외로 너무 잘하고 있었다. 모두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기특했다. 우리 반 반장 '영재'도 나에게는 그날의 천사였다. 우선 아이들을 안정시키고 옆 반을 돌아보았다. 11개 반 중에 교사는 두 명만이 도착해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유선으로 아이들을 모두들 하교시키고 교사들도 정리되는 대로 퇴근하라는 지시가 왔다. 그리고 다음 날은 휴교가 되었다.          

 


 오후 늦게야 비는 그쳤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버스 노선이 운행 중단이었다. 아직 학교에 들기 전인 네 살, 다섯 살 우리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하는 가정집 어린이집에 맡겨진 상태여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아무튼 전화는 불통이니 아무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퇴근을 시도했다. 서울에서 광명 하안동으로 돌아가는 버스라도 일단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가는 데까지 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렸는데 우리 집이 보이는 아파트까지는 완전 물바다였다. 

사람들은 모두 아파트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걸어서 가야 할 형편이었다.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물에 들어서니 물이 무릎에까지 찼다. 약간 내리막 길이어서 점점 물이 올라온다. 흙탕물이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아서 어디가 인도인지 뭐가 있는지 구분할 수가 없다. 조금만 잘못 밟으면 휘청거렸다.           

 


 물속에 들어선 사람들은 언제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모두 ‘우리’가 되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모두 웃으며 서로 손을 잡았다. 순식간에 우리는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생사를 함께 하는 일체감이 돌았다.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중심을 잡으며 걸었다. 도중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휘청거려 넘어지려면 모두가 저절로 ‘어어’ 소리로 위험신호를 알려주고 잠시 멈추고 손에서 손으로 힘을 전달해서 그 사람이 아주 넘어지지 않고 다시 중심을 잡도록 기다렸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조심조심 걸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힘을 모아 서로를 붙잡아 주며 물이 거의 다 빠진 평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손에 손을 잡고 한 사람도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고 물이 어느 정도 빠진 곳에 와서야 모두들 잡았던 손을 놓았다.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아! 다 왔다. 아이고 살았다.”하면서 서로를 돌아보며 웃었다. 잠시이지만 서로에게 자신을 붙들어 준 천사들처럼 고마워했다. 서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애쓰셨어요, 고마웠어요.”하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집에 왔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만세를 불렀다. 

전화도 끊기고 버스 운행도 멈추어서 내가 집에 오지 못할 줄 알았다고 했다. 남편은 출근했다가 심상치가 않아서 만사 제쳐두고 바로 집으로 왔단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오느라 어린이 집을 두 번이나 왕복해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슈퍼에 가서 생필품을 사 오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아파트 1층까지 물이 들어찼다.          

 


 맨홀에 빠져 떠내려가서 폭우로 사망한 뉴스를 보며 너무 안타까웠다. 

그때  ‘우리’가 되어서 손에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 천천히 함께 걷지 않았다면 나도 물살에 넘어지고 다쳤을 수도 있고 집에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을까 싶다. 

남편이 우산을 들어도 자신은 비에 흠뻑 젖으면서도 물살을 가르며 아이들 비 맞을까 우산을 씌워서 아이들을 안고 왔기에 아이들은 그저 수영장 같았다며 재미있어했다.          


 삶은 순간이다. 

길을 나설 때는 멀쩡했는데 어느 순간 발 한 번 헛디뎌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위험한 순간!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걸어야 했고, 누군가 어른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한다면 그것까지도 감내해야 위기는 다시 삶의 기회로 제자리를 잡는가 보다.     


서로를 붙잡아 주는 천사도 있어야 하고 어른다운 어른도 있어야 우리 삶은 위기 속에서도 웃을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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