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결혼식 순서도 정답이 없다. 예전처럼 좋은 말인데 지루하기 십상인 인생선배의 주례사는 없었다. 대신, 신랑 신부가 약속의 글을 낭독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변치 말자’는 식의 뜬구름 잡는 약속이 아니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실천 여부를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약속들이었다. 이를테면 신랑의 약속 중에는 커피를 좋아하는 신부를 위해 유명 메이커인 S커피 쿠폰을 항상 충전해 두겠다는 것도 있었다. 하객들은 모두 “와~”하고 환호를 보냈다.
직장생활에 피곤한 신랑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소파에서의 주말 낮잠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신부의 약속도 있었다. 하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큰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신랑 신부 친구의 편지 낭독이 있었다. 행복을 기원하는 눈물 섞인 간절함과 웃음을 빵빵 터트리는 결혼생활 팁이 담긴 신부 친구의 편지에 하객들은 눈물을 찍어내면서도 폭소로 응원을 해주었다.
신랑 친구의 편지는 하객들을 향해 친구인 신랑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신랑 친구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착하고 부지런한 신랑을 소개했다. 하객들은 신랑의 매력에 환호와 공감의 박수를 보내며 흐뭇해했다.
신랑 소개하는 사례를 들으며 ‘어쩌면 부모인 사촌을 그대로 닮았을까’라고 내심 부러워했다. 사촌인 부모의 신앙, 가치관, 생활습관이 그대로 조카에게 물들어 있었다. 신랑인 조카와 10년 이상 알고 지내면서 한 번도 다투어 본 적이 없다는 신랑 친구의 말이 믿어졌다. 결혼식장 오면서 보았던 곱게 물든 단풍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부모의 삶이 물들어서 조카도 곱게 빛나는 신랑이 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산야를 보며 형형색색 고운 빛깔에 연신 감탄을 했다. 고운 빛깔 퇴색하기 전에, 구겨지고 부서지기 전에, 낙엽이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며 발길에 차이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기 전에, 단풍도 은행나무도 ‘백업’해서 마음에 저장해 두고 싶어 졌다.
이제 새벽 찬이슬과 서늘해진 바람에 당당하던 푸르름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새벽의 찬이슬에 씻기며 맑아졌다.
서늘해진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면서 넘치는 줄 몰랐던 열기를 식혀주었다. 먼지도 털어주었다. 버릴 것은 버리기도 했다.
쏟아지는 태양을 향해 너도나도 푸르게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온화해진 가을 햇살과 맑은 바람이 스며들면서 가을로 철이 들기 시작했다. 푸르름을 밀어내고 각각의 색깔로 물들고 있다. 빨강, 노랑, 주홍 등 각자 빛깔로 어우러지며 우리에게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들 수 있는 것은 밑바탕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잘 기억되지 않는 뿌리의 힘이 숨어 있다.
곱고 황홀한 단풍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어둡고 답답한 땅 속에서 끊임없이 물과 양분을 올려 보내준 뿌리가 있다. 든든한 뿌리가 있어서 한여름 폭염을 이길 수 있었다. 뿌리가 잡아주었기에 폭우와 태풍을 견딜 수 있었다. 조막손 같은 나뭇잎 한 잎 한 잎을 살려내고 단풍으로 곱게 물들게까지 하는 뿌리의 존재를 생각해 본다.
부모로서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를 만난 제자들, 이웃들에게 고운 빛깔로 물들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고 부끄럽다.
결혼식 피로연 포만감을 나누며 근처 공원도 한 바퀴 산책했다. 공원 인도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은행나무가 깊어가는 가을 공원을 환하게 빛내주고 있었다. 멀리, 앞서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황금빛 은행나무와 어우러져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나이 든다는 것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면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황금빛 은행나무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나이가 벼슬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집과 편견의 목소리를 높이게 될까 염려가 된다. 소위 ‘꼰대’가 되지 않을까 늘 두렵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은행나무 아래에 와서 시끌벅적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팔을 벌려 손을 잡고 나무 둘레를 안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마음에 담아 가고 싶은 것은 다 마찬가지인가 보다. 낙엽으로 떨어져 땅에 묻히기 전 눈부시게 빛나는 은행나무의 마지막 모습은 나의 노후를 꿈꾸게 한다.
단풍으로 장관을 이루는 유명산이 부럽지 않은 산책이었다. 서늘한 바람과 한낮의 가을 햇살이 어우러져 따사로우면서도 상쾌했다. 마음까지 단풍에 물들고 은행잎에 밝아진 듯했다..
자꾸 걷고 싶은 가을길이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단풍과 은행나무’를 ‘백업’해서 저장하고 싶어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