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누구나 교과서에서 읽어보았을 수필 한 편이 있다. 바로 피천득 님의 [인연]이라는 작품이다. 길이는 짧지만, 읽고 난 뒤에 남는 여운은 평생을 갈 수도 있는 명 수필이다. 이 수필을 읽으면 언제나 내 마음엔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인연]에서 나와 아사코는 총 세 번의 만남을 가진다. 첫 번째 만남에서 나는 작고 사랑스러운 스위트피 꽃 같은 아사코를 마음에 품게 된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양치기 소년이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대해 품었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첫사랑의 마음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아직은 어설프고 설익은 마음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목련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된 아사코에게 사랑과 동경의 감정을 품게 된다. 둘은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내면이 서로 잘 통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고운 연두색 우산을 본 이후로 나는 [쉘부르의 우산]이란 영화까지도 좋아하게 된다. 이제 나에게 아사코는 가슴속 연모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이 있는 집에서 둘이 함께 살았으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만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과 회한으로 나의 마음은 요동친다. 그러나 세 번째 만남에서 다시 만난 아사코는 시든 백합처럼 변해 있었다. 오랜 세월 마음에 품어 왔던 나의 스위트피, 목련은 이제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의 가슴도 함께 저릿하게 아파진다.
원작 Boyana Petkova, 모작 무아
내게도 [인연]과 비슷한 추억이 있었다. 나는 어린 아사코였고, 그는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청년이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 우리 집 문간방에는 대학생 한 명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집에 방을 구하려고 찾아온 첫날, 나는 어머니 등 뒤에 숨어서 힐끗힐끗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어릴 때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했다. 멀쩡한 청년이 다리를 절며 걸어 들어오는 것을 빤히 쳐다보는 어머니에게 그가 먼저 사정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 눈엔 그의 불편한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얀 피부와 말간 눈동자, 동그란 얼굴만이 또렷이 보일 뿐이었다.
그가 우리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 내겐 오빠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 것인지 그와 나는 이름도 아주 비슷했다. 이름에 'ㄴ' 받침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어서 남매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는 하교하면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가는 게 일상이었다. 주말에도 그가 집에 있을 땐 그의 방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무 살의 그는 열 살이나 어린 내가 귀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금세 밤이 되었고 어머니는 그만 건너오라고 고함을 지르곤 하셨다. 나는 그 시절 그 작은 문간방만 바라보고 그 방의 주인만 기다리는 강아지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집을 떠나자 나는 그의 부재로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심성이 아주 바르고 고왔던 그는 떠나고 난 후에도 나나 어머니에게 전화나 편지로 안부를 전했고, 내 공부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와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 갔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에 대한 마음이 내 안에서 조금씩 커져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로부터 연락이 오자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학교 식당 앞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통화하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이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며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던 해질 무렵이었다. 그날 그는 나에게 대학생이 된 것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가 결혼 전에 한 번 만나자고 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기숙사에 돌아와 붉은 하늘이 까매질 때까지 소리 죽여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앞둔 그를 만나러 갔다. 피천득 님의 말을 대신 빌리자면, 나는 그때 그를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가 결혼할 여자를 내게 소개해 주었지만 그녀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가 너무도 다른 사람으로 느껴져 낯섦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헤어진 지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스무 살, 그는 어느덧 서른 살이 되어 있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내 안에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소중한 무언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 가슴속엔 여전히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어리고 풋풋했던 청년이, 작은 문간방의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동그랗던 그가 변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서른이 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말간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의 스위트피, 나의 목련이 시든 백합으로 변한다는 건 참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안타까움을 평생 품고 살게 되었기에 나는 그때 그를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우리 집에 처음 왔던 그날, 그의 첫 모습을 평생토록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어린 날 여린 내 가슴에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작은 떨림과 설렘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그를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다시 만났고 그는 내게 시든 백합이 되어 버렸다. 피천득의 [인연]이 살다가 한 번씩 기억의 우물에서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이런 추억 때문일 것이다.
이 수필을 읽는 모든 이들도 자신만의 스위트피, 목련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들 것이다. 여전히 아련한 추억 속에서 남몰래 가슴 앓이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면서도 가슴에 꼭꼭 숨겨 둔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제 내게 그는 더 이상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내 삶의 언저리를 아련하게 맴돌 것임은 분명하다. 이제는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우리 집 앞의 그가 다니던 대학교, 창문을 열면 골목이 훤히 다 보이던 그의 작고 허름한 문간방은 내 추억 속에선 언제까지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