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무엇 때문에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것일까? 제 것을 챙기기보단 한걸음 물러나 양보할 줄 알고 소외되어 있는 약자를 배려할 줄 알며 누구에게도 아픔이나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의 얼굴은 내내 어두웠다. 때로는 불행하고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녹록지 않음을 '좋은 사람' 박동훈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일까? 아마도 '나'는 다음으로 아니면 맨 뒤나 저 구석으로 몰아놓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만 '먼저' 바라보고 챙기려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자기 안에 '나'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어서 정작 '나'는 엉덩이 붙이고 앉아 편히 쉴 자리 하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고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드라마 속 '박동훈'처럼 좋은 사람은 못된다. 하지만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길 소망한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종종 마음속에서 '나'를 몰아내고 너를 '먼저' 들여놓기도 한다. 드라마에선 그렇게 사는 박동훈의 진심을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알아주었고 인정도 해 주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냉정하기만 한 사회에서도 그의 진심은 통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과연 그런 해피엔딩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먼저, 나 말고 너부터?
그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좋은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을 보면 흔히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좋다. 선하다. 착하다.' 같은 말들은 너무나 애매해서 알 듯 모를 듯 답답하기만 하다.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가까이 손을 뻗어보지만 아슬아슬한 찰나 눈앞에서 팡하고터져버리듯이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좋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부류의 사람들은 심리학적으로 심리적 강인성을 갖는 경우가 많으며,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건강한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더더욱 오리무중이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선함과 착함은 강함과는 분명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문득 한없이 친절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박동훈이 맹수처럼 격하게 분노하던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형의 눈물을 보고 빌딩 사장에게 사과를 받으러 갔을 때와 이지안을 괴롭히고 때리는 악덕 사채업자를 찾아갔을 때였다. 내 사람을 괴롭히는 인간들은 누구라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살기로 가득 차서 폭언을 하고 주먹다짐을 했었다. 그럴 때 박동훈은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척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 때로는 물 같고 때로는 불같은.
어쩌면 나는 그동안 진짜좋은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강한 사람'이 되었던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부드럽고 친절하게 양보하거나 배려하는 것만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나의 배려가 단지 선함을 흉내내기 위한 얄팍한 가식이었을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왠지 가슴 한쪽이서늘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내가 아닌 타인이 '먼저'인 순간들은 있다. 양보와 배려는 어디까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모두의 기준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양보가 누군가에겐 과한 희생으로 보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마땅한 배려가 누군가에겐 커다란 선행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라는 부사에만 좀 더 주의를 기울여보기로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만 있다면, 정도나 비중이 어떻든간에 좋은 사람이라고 불릴자격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약자에게 친절하고 강자에게도 친절하다. 선 앞에서 부드럽고 악 앞에서도 부드럽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기보다한낱 '나약한 사람'일 뿐일지도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얼마나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인생으로 구현하며 살아왔는지와는 별개로! 그럼 살면서 내가서슴없이 '먼저'를 내어주었던대상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었다.
가족에게만은 '먼저'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그것이 사랑인지 희생인지 분간도못한 채맹목적으로 달려갈 때가 많았다. 누군가는 그런 내게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했고, 누군가는 지나치게 희생만 한다고 걱정도했지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었다.지금 와 생각하건대 '먼저'의 방향과 균형이 늘 문제였던것 같다. '나 먼저'와 '너 먼저' 사이에서 시소 타기를 잘해야 하건만 나는 늘 너를향해 엉덩이를 힘껏 들어주는 것만이, 나 자신은 위태롭게 하늘 위로 올라가 있으면서도 상대가 땅에 착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소는 평형을 이룰 때에만 둘 다 함께 안전하게땅 위로내려올 수 있는법이다.
이제 나는 '먼저'라는 부사를 보면서 '나 먼저'에 대해서도 생각하려 한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언제나 '너 먼저'일 필요는 없다.나에게도달콤하게 앉아 쉴 수 있는작은 자리 하나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문득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혼자서 밥을 먹다가 쓸쓸히 눈물짓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공허하고 외로워지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시소에서 너와 내가 함께 내려와 마주 보며 웃을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그런 양보와 배려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