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대표 서비스업의 생존전략
금융업은 스페인을 자랑하는 대표 서비스업 중 하나이다. 1970년대 후반 민주화 이전까지 스페인의 은행업계는 프랑코 독재 정권의 철저한 보호를 받았다.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며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을 누려왔다. 1960~70년대 7대 상업은행들의 자산 비중은 스페인 전체 상업은행 자산의 70%에 달했다. 이들은 국내 200대 기업의 지분을 25%이상 소유하여 산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67년 스페인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20대 기업에 7대 은행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지방 저축은행들의 예금은 대형 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특정 제조기업에 매우 낮은 금리로 대출되었다. 1980년대까지 7대 대형은행의 은행장 평균 연령은 70대였고 이들 중 2명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이후 줄곧 은행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만큼 경제적 기득권화 되어 있던 분야가 은행업계였다.
1970년대 스페인 7대 은행
Banesto, Banco Hispano Americano, Banco Central, Banco Popular,
Banco de Vizcaya, Banco de Bilbao, Banco Santander
스페인 은행업계는 1980년대 들면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78년 헌법이 제정되고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d유럽공동체 편압을 준비하면서 묵혀있던 스페인 은행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다른 유럽국가들의 선진적인 법과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오일 파동 이후 1978~1985년까지 이어진 극심한 경제위기를 계기로 은행업계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었다. 당시 스페인 은행권 인수합병에는 전체 58개 상업은행, 15개의 저축은행, 전체 예금의 27%, 고용의 28%가 연관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이후 지금까지 스페인 은행업계는 산탄데르(Santander)와 베베우베아(BBVA)가 양강체제로 변모하였다. 1986년 스페인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이후 외국계 은행들의 진입이 시작되었다. 양강체제로 구축은 외국계 은행들과의 경쟁에서 내수 시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기존 스페인 7대 대형 은행은 스페인 기준에서는 컸지만 해외 은행들과 경쟁할 수준은 못 되었다. 1987년 혁신적인 성향의 에밀리오 보틴(Emilio Botín)이 산탄데르 은행장으로 취임하였다. 산탄데르 은행은 1989년 9월 고금리 예금상품을 런칭하며 적극적인 고객 예금유치를 시작하였다. 경쟁은행들은 산탄데르 은행을 부도덕한 은행이라 비난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산탄데르 은행은 가파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Banesto(1994년), Banco Central Hispano(1999년), Banco Popular(2017년)를 차례로 인수하면서 스페인 제1은행으로 부상하였다. 2위 BBVA는 1989년 빌바오 은행(Banco de Bilbao)과 비스카야 은행(Banco de Vizcaya)이 합병되어 BBV가 된 이후 1999년 국영은행인 아르헨타리아 은행(Banco Argentaria)을 흡수되면서 탄생하였다. 이들 두 은행과 함께 방키아(Bankia)와 카이샤방크(Caixa Bank)가 4대 메이저 상업은행을 형성하였는데, 2021.3월 방키아와 카이샤방크가 카이샤방크로 통합되었다. 카이샤방크는 동 인수합병과 함께 국내 자산기준 1위 은행으로 올라섰다.
산탄데르 은행과 BBVA 은행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은행 전문 매체 The Banker가 발표한 기본자산(Tier1) 기준 세계은행에서 산탄데르 은행이 15위, BBVA 은행이 33위에 올랐다. 시티그룹(Citigroup)이나 홍콩은행(HSBC)이 주로 대기업 서비스에 집중하고, 제이피모건(JPMorgan)이나 도이치 은행(Deutsche bank)이 뉴욕이나 런던 등에 투자 허브를 구축하여 글로벌 금융회사로 성장 한데 반해, 이 두 은행은 소매금융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산탄데르 은행과 BBVA 은행은 대부분의 매출을 해외에서 기록하는데 산탄데르 은행의 최대 매출 국가는 브라질이며 BBVA 은행의 최대 매출지역은 멕시코이다. 이들의 비즈니스는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2000년대 후반 스페인에 닥친 금융위기에도 상대적으로 선방할 수 있었다.
80년대 이후 스페인 은행업계 내 또 하나의 트렌드는 지방 저축은행의 급격한 증가였다. 까하(Caja)로 알려진 지방저축은행들은 1980년대 전체 예금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1993년부터는 원하는 지역에 지점을 개설할 수 있게 되면서 지점수가 과할 정도로 늘어났다. 1990년부터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전까지 일반 상업은행의 지점수는 16,917개에서 15,568개로 감소한 반면, 저축은행의 지점수는 13,642개에서 25,000개로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들 저축은행들은 비상장은행으로 주주가 없었고 내부직원, 고객, 지역 정부인사 등으로 구성된 자체 집행이사회의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이사회에는 금융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적 인사들이 많았다. 따라서, 은행 운영이 정치적이었고 전문성이 떨어졌다. 상업은행과 규제 체계가 달라 중앙은행의 감시도 제대로 받지 않아 불합리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회계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저축은행은 중앙은행이 아닌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감독했다.
이민자의 급격한 유입과, 유로존 가입 이후 지속적인 경기확장으로 2000년대 들면서 스페인 부동산 시장에는 버블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97~2008년 사이 평균 집값은 3배가량 상승하였으며, 금융권의 느슨한 대출규제는 버블형성을 부추겼다. 한 때 부동산 개발업에 대한 스페인 금융권의 대출규모가 GDP의 50% 수준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버블은 2007~2008년 미국 금융위기의 전 세계적 확산과 함께 붕괴되었으며 스페인도 2009년부터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진다. 대출상환 실패사례가 늘어나면서 스페인 은행권의 부실채권율은 2006년 0.6%에서 2013년 13.8%로 급증한다. 악성자산이 증가하면서 스페인 은행권 전체의 수익도 2007년 250억 유로에서 2012년 -740억 유로로 급감하였다. 특히, 7개 저축은행을 통합하여 생긴 방키아(Bankia)의 상황이 심각하였다.
스페인 금융권은 사실상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스페인 정부는 금융기관 자본확충 및 구조조정을 위해 2012년 6월 유럽안정화기구(ESM)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2012.7.20. 유로그룹(유로사용 회원국 재무장관 회의)은 스페인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스페인 정부기구인 은행구조조정기구(FROB)에 1,000억 유로를 지원하도록 승인한다. 정부지분 100%로 구성된 은행구조조정기구(FROB)가 2009년 6월 저축은행 등 금융부분의 구조조정을 위해 설립되었다. 최종적으로 유럽안정화기구(ESM)는 2012년 12월, 2013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413억 유로를 대출형태로 스페인에 지원하였고 스페인 금융부문의 자본확충 및 구조조정에 한정하는 조건으로만 제공되었다.
구제금융을 기반으로 스페인 정부는 대대적인 은행권 구조조정에 돌입하였다. 은행별 자산실사 및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에 따라 총 559억 유로의 자본확충이 실시되었다. 부실자산은 부실자산전문기관(SAREB)으로 전부 이전시키며 전반적인 유동성과 수익성을 개선하였다. 또한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체계 및 금융상품 판매 시 소비자에 대한 공지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금융시스템 개혁을 단행하였다. 스페인은 금융권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구제금융도 1년 반만인 2013년 12월에 졸업하였다. 클라우스 레글링(Klaus Regling) 유럽안정화기구(ESM) 총재도 스페인의 구제금융 관리체제 조기졸업을 성공적인 구제금융 사례로 평가하였다. 금융권 구조조정 이후 5대 은행의 자산비중은 2008년 49%에서 2017년 70%로 확대되었으며 같은 기간 55개에 달하던 은행은 14개로 정리되었다. 2005년 45개에 달했던 저축은행은 2017년 2개로 거의 전멸하였다.
구조조정 이후 스페인 금융권은 자국의 경제회복과 함께 안정을 되찾았다. 자산의 건전성은 꾸준히 개선되었고 수익성도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왔다. 그러나 2020년 들이닥친 코로나 19로 은행업계는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하였다. 경기부양을 위한 초저금리 기조가 장기화 됨에 따라 수익성 개선이 더욱 요원해졌다. 여기에 디지털 은행과 핀테크 기업들과 새롭게 경쟁을 펼쳐야 한다. 유럽 내 상업은행들 사이에 비용구조와 효율성 개선을 위한 인수합병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유럽중앙은행(BCE)도 수년 전부터 은행들의 인수합병과 관련된 규제를 완화하는 등 은행들 사이의 인수합병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2020.12월 8,11위권에 올라있던 우니까하(Unicaja)와 리베르 방크(LiberBank)는 인수합병의 합의하며 스페인 5위의 시중은행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BBVA 은행도 5위 은행인 사바델 은행(Banco Sabadell)과 수년간 인수합병을 논의해 왔으나 양측의 협상은 2020.12월 일단 결렬되었다. 향후 협상 재개 여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수십개의 은행이 난무했던 과거와는 달리 주요 메이저 은행들의 시장집중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형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현재 스페인 내 Top 3 시중은행은 카이샤방크, BBVA 은행, 산탄데르 은행이다.
스페인 주요 시중은행(2021년)
산탄데르 은행(Santander), BBVA 은행(BBVA), 카이샤방크(CaixaBank), 방크인테르(Bankinter),
아방카(Abanca), 우니까하(Unicaja), 이베르까하(Ibercaja), 쿠샤방크(Kutxab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