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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Nov 24. 2021

아기 토끼와 아기 사자의 나뭇잎 편지

 첫눈이 오고, 날씨가 추워졌다. 등원하는 아이에게 핑크색 토끼 모자를 씌워주었더니 자기는 토끼라며 깡충깡충 뛰며 좋아다.


M: 우리 오랜만에 걸어가 볼까? 

S: 응! 좋아!


 아이와 길을 나섰다. 찬바람이 불어와 나는 외투에 달린 털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런데 갈색빛 풍성한 털이 꼭 사자의 갈기처럼 보였나 보다.


S: 엄마 그거 쓰니까 꼭 아빠 사자 같아!

M: 어흥! 엄마는 사자다!

S: 꺅. 엄마 무서워.

M: 그럼 아빠 사자 말고, 아기 사자 할까?

S: 좋아! 나는 아기 토끼고, 엄마는 아기 사자야.


 우리는 아기 토끼와 아기 사자가 되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아가 앙상한 겨울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S: 아기 사자야. 나무들은 춥겠다.

M: 왜?

S: 나무들은 옷을 다 벗고 있잖아. 우린 입고 있는데.

M: 그러게. 겨울이라 잎이 다 떨어져서 나무들은 춥겠다. 겨울에는 추워서 잎이 다 떨어지거든.


 모든 아이들은 시인이라더니,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시인의 눈과 닮아있다.


그때 아가 황급히 소리쳤다.


S: 아기 사자야! 저기 코스모스가 있어!

M: 어디?


 첫눈이 벌써 내린 이 추운 겨울에 꽃이 남아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예상을 깨고, 가 가리킨 곳에는 앙상한 나무에 분홍빛 꽃 두어 송이가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다.

겨울에 피어있는 꽃


M: 정말 꽃이 피었네? 그런데 이건 코스모스가 아니고 철쭉 같은데? 진달래인가?


철쭉이든 진달래든 봄에 피는 꽃 아닌가? 나는 철쭉이라 말하면서도 이 겨울에 꽃이 피어있는 게 신기하여 꽃을 만져보았다. 혹시나 누가 나뭇가지에 올려둔 게 아닐까 의심을 하면서. 그러나 놀랍게도 꽃은 찬 바람을 이겨내고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코스모스도 모두 져버린 11월 중순에 철쭉이라니.


S: 아기 사자야. 꽃 너무 예쁘다. 이 꽃은 안 추운가 봐.

M: 그러게 말이야. 정말 신기한 꽃이다.


 나는 아가 발견한 꽃을 한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도 연약한  아직 살아남아 있다니. 주변은 온통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가득한데 저 꽃의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문득 저 꽃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암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나를 괴롭혀도 나는 지지 않고, 저 꽃처럼 예쁘게 피어있고 싶었다. 그때 아가 다시 소리쳤다.


S: 빨간 열매다!

M: 어디?

빨간 열매

 가 뛰어간 곳엔 이름 모를 빨간 열매가 가득 피어 있었다. 잎이 이미 다 떨어져 버린 나뭇가지에 무수히 많은 빨간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은 이미 겨울이었지만, 아직 가을의 온기가 남아있는 걸까.  빨간 열매들은 혹독한 칼바람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무 사이로 울긋불긋 단풍잎이 보인다. 절반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절반은 지상에 내려온 채 하늘과 땅을 노랗게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계절은 이미 겨울이 되었건만 자연은 아직 겨울이 되고 싶지 않은지 가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록달록 가을이 물든 하늘과 땅

 내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동안 아이가 슬며시 단풍잎을 하나 주워서 내게 내밀었다.


S: 아기 사자야. 너 아직도 쭈쭈 아파?

M: 응, 아직 조금 아파.

S: 그럼 병원 가서 나 보고 싶을 때 이거 .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가 어린이집 갈 동안 나는 병원에 가곤 했는데 "엄마가 병원 다녀와서 데릴러갈게." 했던 말들이 아이에게는 마음속 깊이 남았나 보다.


S: 그리고 나도 하나 주워줘. 나도 어린이집에서 너 보고 싶을 때 이거 볼게.


 나는 아이를 닮은 예쁜 단풍잎을 하나 주워 건넸다.

아이가 빙그레 웃는다. 우리는 서로가 보고 싶을 때 단풍잎을 꺼내 보기로 약속하며 마주 보고 웃었다. 

아이와 주고 받은 나뭇잎 편지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이 공존하고 있던 아침.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를 거닐며 아이에게 선물할 나뭇잎들을 주웠다. 손바닥만 한 큰 엄마 단풍잎, 아기 손처럼 작은 아기 단풍잎, 마치 여름을 상기시키는 연둣빛 나뭇잎까지.. 어쩜 이렇게 가지각색의 빛깔을 갖고 있을까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나뭇잎이 바스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손가락 끝으로 나뭇잎 여러 장을 잡았다. 나뭇잎을 쥔 손가락이 얼어붙을 것처럼 시렸지만 이걸 보고 좋아할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니 흐뭇했다. 그리고 이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예쁜 가을 우리 곁을 떠나고 있는 것도 모를 뻔했다. 더 늦기 전에, 낙엽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가을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이가 오늘 내게 선물한 것은 나뭇잎 한 장이 아니라 가을 그 자체였음을. 아이와 주고받은 나뭇잎 편지는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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