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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경 Nov 27. 2021

엄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어느 날 아이가 진첩을 보며 내게  물었다.


S: 엄마. 여기 엄마  속에 소은이 있지?

M: 그럼. 엄마  속에 소은이 있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어땠어?

S: 나 기억나. 엄청 따뜻하고 좋았어.


 아이가 보고 있던 건 내가 소은이를 임신하고 만삭 때 찍은 스튜디오 사진이었다. 아이가 네 살 정도 되어 말을 잘하게 되면  속에서의 기억을 얘기하곤 한다는 주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고 과연 그게 정말일 몹시 궁금했었다. 나는 '이 때다!' 싶어 아이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M: 그래? 그럼 엄마, 아빠 목소리도 들렸어?

S: 응, 들렸어.

M: 그럼 엄마, 아빠가 소은이한테 뭐라고 불렀는지도 기억나?

S: 응, 기억나. 빼빼


 소은이의 태명이 빼빼였다면 정말 소름 돋았겠지만,  소은이의 태명은 빼빼가 아니라 은총이다. 요즘 소은이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거나, 딴청을 부릴 때 '빼빼'라는 말을 쓰곤 한다.


M: 소은이 속에 있을 때 이름은 빼빼가 아니라 은총이였어.

S: 아니야. 빼빼야.

M: 그럼 엄마, 아빠가 소은이한테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

S: 소은이 예쁘대.


 이건 린 말은 아니니 소은이가 정말 기억을 하고 말하는 건지, 그냥 말하는 건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가  속에 있을 때의 느낌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후로도 소은이는 엄마의 젊은 시절의 사진만 보면 '엄마 속에 소은이 있지?'를 물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심지어 임신 전 사진을 볼 때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럼, 엄마  속에 소은이 있지.'라고 대답하며 아주 오래전 '난자'였을 시절의 소은이를 생각하며 소은이가 엄마  속에 있다고 답하였다.


 어느 날 소은이가 다시 나의 만삭 사진을 보고 있었다.


S: 엄마, 이 때는 정말 예쁘다. 공주님 같아.

M: 그래? 엄마 공주님 같아?


 내가 봐도 사진 속 나는 지금보다 예뻤다. 생기발랄한 표정, 찰랑거리는 긴 파마머리, 새하얀 드레스.. 소은이 눈에 공주님 같이 보일만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 행복했지.' 싶었다.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칠 줄도 모르고.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예민한 아이가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러다 결국 암에 걸릴 줄은 더더욱 모르고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S: 응, 정말 예뻐. 근데 이 때는 예뻤는데 지금은 왜 안 예뻐?

M: 그래? 엄마 지금은 안 예뻐?

S: 지금도 예쁘긴 한데 좀 덜 예뻐.

M: 아빠는 어때? 아빠는 똑같아?

S: 응, 아빠는 똑같이 멋있어.

S: 근데 엄마는 이 때는 피부가 좋았는데 지금은 왜 그래?

M: 너 때문에 그렇지!


 아뿔싸. 나도 모르게 진심이 툭 나와버렸다. 은연중에 소은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던 걸까. 출산과 육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린 게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에 순간 심술이 났던 걸까. 비록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아이는 말속에 담긴 가시를 정확히 읽어낸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아이는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바로 알아챘다. 아이를 꼭 껴안고 바로 사과를 했지만 아이는 그칠 줄을 몰랐다. 예뻤던 엄마가 자기 때문에 안 예뻐졌다는 말이 아이에게는 큰 상처가 됐던 것이다.


M: 아냐, 소은아. 엄마가 잘못 말한 거야. 엄마가 이 때는 화장을 했고, 지금은 화장을 안 해서 그래. 엄마가 정말 미안해.

S: 엄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엉엉엉.


 나는 황급히 말을 둘러댔고, 아이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아프고 나서 아이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너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라는 말이었기에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자칫 잘못하면 아이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아이에게 얼떨결에 '너 때문에 엄마가 안 예뻐졌다.'라는 말을 해버린 셈이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를 보며 내 마음도 얼마나 아프던지. 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사과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엄마는 소은이를 정말 사랑해. 엄마는 소은이가 엄마, 아빠 딸로 와줘서 정말 고맙고 행복해. 소은이는 너무너무 소중해. 엄마, 아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야.'


 그제야 아이는 안심이 된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 보물 메시지는 아이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이다. 아이 얼굴을 내 무릎 위에 올려두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속삭인다. 그러면 아이는 잠결에도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도, 아이도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나는 언어에 담긴 힘을 믿는다. 반복해서 전달된 메시지는 아이에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인은 지금처럼 예기치 못한 상처를 받게 되었을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아이가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은 방어막이 되어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를 보호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소중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요즘 아이는 '내 소중한 OO'라는 자작곡을 지어 흥얼거리곤 한다. '내 소중한 엄마, 아빠'로 시작하여 내 소중한 토끼, 내 소중한 강아지, 내 소중한 곰돌이, 내 소중한 공룡 등등... 끝도 없이 소중한 것들과 그에 대한 설명들이 펼쳐진다. 한 번은 10분도 넘게 소중한 것에 대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소중한 것들이 화수분처럼 계속 쏟아져 나왔다.


 소은이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네 살 아이가 자기가 만들어낸 멜로디에 노랫말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사실에 감탄했다. 두 번째는 일상 속에서 소중한 것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 내리는 게 놀라웠다. 세 번째는 아이에게 소중한 것들이 이렇게도 많다는 사실에 반가웠다. 그리고 아이의 노래를 들으며 이 노래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길 소망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아이에게 소중한 것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소한 것조차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이 사랑스러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들판에 피어있는 민들레 홀씨도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의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보석보다도 값질 테니까.


 이제는 엄마의 말실수도 감싸 안아주는 아이를 보며, 어느덧 아이가 많이 크고 단단해졌음을 느다. 다시는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말자고 다짐을 해보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런 순간이 다시 오더라도 아이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부모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그리고 행동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부모의 사랑한다는 말은 주술이 되어 아이를 지키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고, 부모의 행동은 아이로 하여금 부모의 말을 믿게 하는 신뢰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내일 아침, 오늘보다 더 사랑스러운 말투로 아이에게 사랑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아이의 바람대로,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마음에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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