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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라 Nov 17. 2019

기분 좋은 잔소리

초등학교 3학년, 직장인 3년차 계단에서 넘어진 날

초등학교 3학년 나는 처음 발을 접질렸다. 학교 계단에서.

걷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든 집까지 데려가겠다며 언니는 끙끙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부축해서 집으로 왔다.

엄마는 그 날 경악을 하며 화를 냈다.


“엄마보고 데리러 오라고 전화했어야지!”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은 시도때도 없이 전화하는 우리에게 전화하지 말고 부르지 말라고 했던 날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혼날까 전화하지 않고 꾸역꾸역 그 거리를 걸어서 왔다. 내 발은 퉁퉁 부었고 나는 정말 그 길이 잊혀지지 않는다. 가파른 내리막 길을 어린 내가 걷기에는 아팠고 힘들었고 서러웠다. 그 말에 언니랑 나는 서럽게 “엄마가 전화하지 말라 했잖아요!” 라고 말했던 날이 있었다. 아마 그 말에 엄마는 많이 아프지 않았을까.


그 시절 우리집은 가난했다. 우리 부모님은 무너진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셨고 우리 셋을 최선을 다해 먹이고 입히셨다. 심지어 엄마는 새벽기도를 매일 나가 우리를 위한 기도를 심었다. 그 때 엄마는 어떤 기도를 했을까?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 같다. 요즘은 내가 좀 커서인지 엄마의 뒷 모습을 많이 마주하게 되는데 알 수록 부모님의 사랑과 마음은 내가 자녀를 낳지 않고는 알 수 없구나 되새기게 된다.

 

그 때, 마냥 어리기만 했던 우리 삼남매는 나름의 방법으로 함께 지키고 사랑하고 버텼다. 지금도 때때로 우리는 그 때가 있었기에 이겨내고 그 때가 있었기에 다시 아픔에 잠길 때가 있다.


오늘 교회를 가려 집 계단을 내려가다 나는 넘어졌다. 그리고 발목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딱 초등학교 3학년 그때 같았다. 서러웠다. 계단을 올라오는데 언니가 부축해 걷던 그 거리가 생각났다. 집에 들어와 언니의 방문을 열고 나는 또 울었다. 울면서 웃겼다. 언니는 해결해줄 수 있는게 없는데 그냥 나는 언니가 필요했다. 언니는 그런 나를 꼬옥 다독여줬다.


병원을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한 뼘 자랐다. 이제는 엄마 손을 잡고 가지 않아도 혼자가도 될 만큼 아파도 조금은 참을 수 있을 만큼 어떻게 할지 스스로 결정할 만큼. 발을 접질렸다는 소식에 엄마와 아빠는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두 분도 아팠을 시절에 내가 아팠기에 부모님은 여전히 언제나 내가 발목이 약하다는 사실에 같이 아파하신다. 어린시절 아이가 아팠던 곳은 부모님에게도 아픈 자국으로 남는가보다. 폭풍같은 부모님의 잔소리가 좋은하루였다.


“지금이야 젊어서 괜찮지! 관리 안하고 늙으면 발목이 얼마나 아픈대! 조심좀 해”

“엄마가 그냥 서울가서 같이 살아야겠어.. 아프면 내가 아주 심장이 덜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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