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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eong Ellen Kwon Aug 30. 2023

내게 소통이라는 것의 의미

 시대에 따라 그리고 시절에 따라 나는 변화한다. 어느 시대, 어느 시절의 내가 가장 좋은 버전의 나인지, 나였는지, 나일지 알 수 없다. 여기에 지리적 변수를 준다면 좀 더 다양한 버전의 내가 가능하다. 어찌 되었건 나는 변화하는 존재이고 내게서 파생되는 많은 것들 또한 내외부적 요인에 따라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


 모든 것이 매 순간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상당 시간 유일하게 불변하는 것은 본질뿐일 수 있다. 나라는 개체의 본질은 내 유전자 지도에 있을 것이다. 생명의 본질, 지구의 본질, 우주의 본질은 그 하위 개념들의 본질을 포함하고 조합한 상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바탕에, 그저 무형의 법칙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 그 무형의 법칙인 우주의 유전자 지도를 밝혀내는 학문이 물리학이고, 또한 물리학을 사람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 것이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When I was young


 장엄한 자연 앞에 서 있을 때, 광활한 우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스스로의 미미함을 체감하는 동시에 무한한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건 아주 작은 것들에게 조차 공평하게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을 우연히 관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눈송이의 형태 같은!). 온 우주에 적용되며 예외라곤 없는 법칙이 주는 안정감. 그리고 그건 단지 관찰이나 무언가에 세부적인 공식들을 대입해 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연히 마주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직관적으로 무한한 안정감을 느낄 때, 나는 그럴 때 내가 인간이 지은 이야기가 아닌 우주가 지은 이야기의 플롯을 잘 따르고 있는 중임을 실감한다. 물리학과 철학이 그 이야기를 공식화하는 작업이라면 예술은 그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내려는 시도가 아닐까.


 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새벽 밤하늘에서 관측한 토성을 보았을 때 나는 거대한 우주가 나를 껴안아준 듯한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훨씬 고화질인 천체 망원경이나 우주 망원경으로 찍은 토성 사진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물론 태양계를 훨씬 넘어 더 멀리 있는 은하와 성운의 사진도 수 없이 보았겠지만, 하다못해 화성은 탐사선이 직접 찍은 현장 영상까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때 느꼈던 감동과는 확연히 다른 무엇이 있었다. 유튜버가 카메라를 계속 확대하자 보이던 고리가 선명한 토성의 모습, 아주 작았지만 뚜렷이 존재하던 그 모습. 지구 밖에서가 아닌 지구에서 우주를 향해 한 개인이 바라본 토성의 형체는 토성이, 토성을 넘어 전 우주가 실제로 우리가 바라보는 저기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토성이 저기에 있다. 저 멀리 있는 그 거대한 토성이 아주 작게나마, 그 고리까지 다 보인다.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을 때의 황홀함, 광활한 우주가 존재함을 오감으로 느끼는 이 다행감, 우리의 지구가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을 것임을, 이 우주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클 것임을 감히 실감하며 느끼는 이 기대감.



 얼마 전, 에니어그램을 함께 공부하는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엔 우리 개개인의 의미, 존재 가치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우리 하나하나가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결국 우주는 나라는 각각의 개체에 의해 인식되고 나의 우주로써 각각의 우주는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식의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법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또한 우리는 우주에서 봤을 때는 미미한 존재겠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가지는 한, 그리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 한 누군가에게 누군가는 우주를 넘어선 의미를 가지는 게 사실이라고도.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NASA의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아주 먼 우주를 향해 편도행 티켓을 들고 떠나게 되었다면 어떨까? 우주선에는 단지 나만이 타고 있다면, 나 혼자 지구의 시공간을 벗어나 점점 작아지는 지구를 바라보며 빠르게 멀어져 가고 있다면, 더 이상 지구의 누군가와 소통할 수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면. 광대한 우주 속으로 여행하며 내 안에서 우주의 의미는 더욱 커지지만 우주 속에서 나의 의미는 점점 미미해지면 그제야 비로소 실질적인 우주의 거대함을, 실질적인 나의 작음을 체감하게 될까. 그 객관적인 균형을 잡아가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일까.


 오랫동안 홀로 세계를 여행하며, 방랑을 정체성의 주축으로 삼아 여기저기를 떠돌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통신 기능이 상실된 채 지구를 공전하는 우주 망원경 같다고. 멀고 막연한 미지의 세상을 꿈꾸었고, 실제로 그곳들에 닿았고, 많이 보았고 경험했고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들은 오로지 그저 내 안에만 존재했다. 나는 내가 지나온 길이 자랑스러웠고, 나의 궤도를 좋아했지만 원래부터 미약했던 통신 기능 때문에 지구로 내가 무엇을 보았고 경험했는지 전달할 수 없었다. 나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가질 수 있는 존재감을, 나의 존재 의미를 충분히 느껴보지 못했다.

 세상을 널리 둘러보며 세상 속으로 여행하며 내 안에서 세상의 의미는 더욱 커져갔지만 세상 속에서의 나, 통신하지 않고 혼자 존재하는 우주 망원경과 같은 나의 의미는 점점 미미해졌다. 나는 편도행 티켓을 들고 저 먼 우주로 향한 우주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경험이 주는 황홀함은 왠지 모르게 점점 작아져만 갔다.



 나는 내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정하다, 따듯하다는 류의 말을 많이 들었고 스스로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겹게 구는 성격이라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금방 정이 들곤 했고, 타인의 좋은 면을 위주로 보는 습관이 있어서 친구들이나 하물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 사람 보는 촉이 없다, 투명하다 등의 걱정 어린 말도 듣곤 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듯 잘 집중하는 편이라 그런지 여행지에서 만났던 허세가 좀 강한 이들이 내게 말도 안 되는 여행 무용담을 지어내 들려준 적도 종종 있었다(그땐 다 믿었는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다). 아무튼 나는 내가 늘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며, 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별생각 없이 믿어왔다. 크게 미움받을 일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언제부턴가 난 사람들이 좀 두려워졌다. 오래된 관계, 서로의 충분히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내겐 두려울 가능성이 늘 잠재된 사람들이 되었다. 아니 그들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들을 대하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할 수 있는 실수들, 줄 수 있는 상처들, 범할 수 있는 무례들(놓칠 수 있는 배려들), 판단될 수 있는 나의 태도들이 두려웠다. 사실 그들이 두려운 것도 맞았다. 타인은 나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건데, 그들의 기준에서 벗어나고 엇나가 불쾌감을 발생시킬 수 있을 여지가 있는지 나의 기준을 늘 의심하고 돌아봤다. 내 기준은 계속 흔들렸고, 나는 붙잡고 설 것이 없어 휘청거렸다. 타인의 기준이 아주 틀린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지만(틀렸다는 확신이 들면 오히려 불쾌감을 주고 싶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기준을 맞출 수 있는 아주 좁고 완벽한 범위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만을 지키고 따르는 사람이 될 자신도 없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애초에 왜 그래야 하는지, 자존감에 문제가 있나 싶기도 한데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겐 이런 경향이 있다. 과하게 눈치를 보고 움직일 때가 종종 있으며,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계속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느라 어깨부터 뒤통수까지 온통 뻐근해지곤 한다.


 이건 내가 착해서, 사람을 좋아해서, 관계를 중시해서 나오는 태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대부분은 말했듯이 두려움에서 나온다. (선한) 타인의 마음이 다칠까 두렵고, 타인에게 내가 오해받을까 두렵다. 그 오해가 적대감으로 비추어질까 두렵고, 그게 내게 공격이 되어 돌아올까 두렵다. 그렇게 내가 느끼게 될 불쾌감과 불안과 공포감이 두렵다.


 게다가 이런 두려움은 주변인이나 새로 만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언젠가부터 난 세상이, 불특정 다수가 매우 두려워졌다. 아니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난 원래 겁이 많은 아이였지만 또한 열정도 많고 도전 정신과 충동성도 강한 편이라 인생의 어느 시기들에, 어떤 순간들에 그 겁쟁이는 잠시 숨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멀쩡히 장착된 통신 기능을 나라는 우주 망원경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처음엔 내가 보고 담아낸 것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 뒤로는 좀 더 완벽히 편집해 전달하려다 시기를 놓쳐버렸다. 언젠가부터는 내가 전달하려는 것들을 다른 우주 망원경이나 인공위성이 가로챌까 두려워졌고, 어렵게 전달한 것들은 지구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두려웠다(무관심은 차라리 나았다).

 나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탐색하며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으로, 지구 쪽으로 안테나를 돌리지 않는 것으로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나날들을 영위했다. 통신하지 않는 것은 통신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해 보이는 선택이었다.


 

 2021년 겨울, 오랜만에 떠났던 열흘간의 국내 여행에서 뭔가 분명한 느낌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새벽에 가깝던 늦은 밤, 아마도 남원이었던 것 같다. 도심의 외곽, 텅 빈 낯선 길을 오랫동안 홀로 걸어 숙소로 가다 문득 너무나 큰 충만감을 느꼈다. 낯선 도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 저 앞엔 무엇이 있을지 몰라 새롭고 기대되는 길,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밤.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열려있는 듯한 그 가운데에서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면서, 아 나는 자유를 위해 사는구나 그게 내 최고의 충만이구나를 실감했더랬다.

 오랜만의 여행, 이번에야말로 여행기를 한번 적어봐야겠다고 세웠던 결심은 뒤로 밀린 지 오래. 나는 소통보다는 표현을, 표현보다는 경험 그 자체를, 끝없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기약 없는 여정 그 자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명확했다.


 그러나 또 하나, 어쩌면 더 명확한 무엇도 있었다. 그간의 그러했던 여정에서 가장 강렬히 기억나는 감정은 좌절감과 고립감이고, 가장 분명히 얻은 것은 죄책감과 불안장애였다. 나는 세상의 많은 골목들을 왜인지도 모른 채 눈물 흘리며 걸었다. 부서지고 망가진 채로 한국에 돌아와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도 사실, 아니 그게 현실이었다.

 더 이상 지구를 외면하고 있는 불안한 우주 망원경, 만들어진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한 기계로 남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수많은 우주 망원경 중에 작고, 게다가 망가진 채 제 멋대로 탐사 중인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젠 제임스 웹 같은 멋진 우주 망원경이 되고 싶다. 미미하지 않은 의미가 되고 싶고, 흔들리지 않고 존재하고 싶다. 통신 기능을 켜는 버튼을 누르기 전 벌벌 떨고 있는 지금임에도 그 버튼을 누를 용기를 결코 내야만 한다고, 그냥! 그래도 된다고, 그렇게 믿어보자고 스스로에게 계속 소리치고 있는 이유다.



 사람들이 모두 본질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겉 껍데기들끼리의 부조화로 일으키는 그 어떤 것들에도 상처받지 않고, 서로의 본질만을 보며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진심을 알아보고, 오해될까, 빼앗길까 걱정하지 않고 내가 보고 생각한 것들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며, 아 괜찮구나 하며 안심하고 스스로를, 그리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충분한 사람이기를 먼저 바래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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