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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May 29. 2017

커피 한 잔의 풍경

향과 맛이 만들어내는 정경에 대하여

일상의 쳇바퀴에 따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가장 자유로울 때를 꼽자면, 글을 쓰러 찾아가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이다. 지금의 집 근처에서 정성스럽게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이 카페를 발견한 후 거의 매일이라고 하다시피 가게에 들러 커피를 마신다.

   

과테말라 와이칸, 에티오피아 로미타샤, 파나마 핀카 플로라, 페루 카하마르카, 브라질 하이냐 내추럴, 에티오피아 아리차 내추럴…. 가게에 들어서면 긴 이름의 커피콩들이 유리병에 소담히 담겨있다.

 

때로 손님을 주눅 들게 하는, 길고 복잡해 보이는 이름들이다. 이름 자체만으로도 먼 곳에서부터 이곳에 도착했음을 상상케 하는. 글을 쓰다 멈추게 될 때, 문득 이 이름들을 읽어보기도 한다.

나는 별 고민 없이 주로 카페 라테를 마시는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한 순간이라도 서둘러 시작하고 싶어서, 늘 이곳의 블렌딩 커피로 선택한다.

     

이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독특한 점이 있다면 무엇을 시키건 상관없이 주인이 늘 시음 커피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음료를 주문하면 작은 종이컵에 그날의 커피가 함께 나온다. 지금 내 옆에 아이스 라테와 함께 작은 잔에 담긴 ‘에티오피아 아리차 내추럴’이 있는 것처럼.


간단한 서비스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작은 대접이라 해도, 규모가 크지 않은 동네 카페에서 매일 누구에게나 이와 같이 대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인은 커피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다. 그 애정이 그곳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커피의 다양한 세계를 접하게 하고 싶은 바람으로 이어진다.

     

그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음은 나 자신의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아리차 내추럴’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맛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딘지 흙냄새가 강하게 느껴졌고 뭔가 커피라기보다는 콩으로 만든 음식의 향취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안에서 조금씩 다양한 결의 맛이 느껴졌다. 입 속에 좀 더 풍성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매일 반복적으로 성실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간을 쌓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커피의 맛은 일관되겠지만 그 경험은 계절에 따라 미묘하게 달랐다. 추운 겨울에 코트를 입은 채 글을 쓰며 맛본 커피와 지금과 같은 계절, 카페 건너편의 초록빛 나무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의 맛은 똑같은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입 안으로부터 퍼지는 향기와 커피의 짙은 갈색 빛은 여름의 튼튼한 나무줄기와 만나고, 그 향기는 나뭇잎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움직인다. 커피 한 잔에서 시작되지만 그 경험은 커피를 둘러싼 풍경, 그 풍경이 그려내는 느낌으로 확장된다. 그렇게 뻗어나가는 경험 속에는 어딘지 자유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자리하는 것만 같다.

     

지금은 5월 말. 이 늦봄도 지나가고 곧 뜨거운 여름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그 시절 역시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 시작된다. 점점 짧아지는 계절이지만 가을은 마음속의 잔여물들을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주는 때인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도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커피 맛은 또 어떨까.

흔하고 또 평범한, 누구나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우리는 또 평범하게 하루의 시간을 지나간다. 커피가 주는 위로와, 자유와, 작지만 조촐하게 아름다운 감각의 향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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