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렌의 가을 Dec 20. 2017

저녁이 내려오는 시간

Falling light

낮의 시간이 조금씩 물러날 때, 저녁은 어느새 내려앉는 눈처럼 조용히 내려온다.      

 

즐거움을 찾아 발랄한 기운으로 소매를 올리던 낮의 발걸음이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그 옷깃을 내린다. 내리쬐던 태양이 그 빛을 거두어가기 시작하면 하루라는 우리의 잊지 못할 눈금이 또 한 칸 앞으로 이동한다. 이때 앞으로, 라는 건 그저 임의의 기준일 뿐, 칸은 채워지지만 그것이 앞인지 옆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낮의 발걸음만이 알 뿐.      


겨울이면 사라져 가는 빛은 깊어진다. 눈이 내린 날이면 한층 더. 눈을 머금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지상에는 연한 하늘빛의 그늘이 한 겹 더 드리워져 있다. 구름이 감싸 놓은 공기 중에 아직 눈의 기운이 남아있다. 차갑고, 천천히 떠다니던, 누구나에게 꼭 같은 속도로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 눈꽃은 눈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전체 위에 수많은 알갱이로 번지며 피어날 줄을 안다. 한 송이 눈 안에 셀 수 없는 눈송이가 있다.


저녁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인형 뽑는 기계 안에 켜진 조명이 조금씩 밝아진다. 인형들이 고개 숙인 채 무더기로 쌓여있다. 지나가던 아이가 그것을 힐끗 쳐다본다. 솜이 두터운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꼭 넣고 걸어가던 아이는 이내 걸음을 빨리한다. 손이 묶인 그가 빙판 위에 미끄러질까 잠시 걱정하던 나는, 그에게 장갑을 끼워 줬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가 지나간 길 위로 퇴근시간의 차들이 하나 둘 지나가고 나무들의 가지 위에 쌓인 눈이 바람에 흩날린다. 가끔 마주치던 낯익은 고양이가 솜씨 좋게 질퍽거리는 눈 웅덩이를 피하다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사뿐사뿐 걸어간다.     


비상등을 켠 차 안에는 연인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길에 깔린 눈 위로 그 반짝임이 깜빡거리며 그를 재촉한다. 오늘 그들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갈 것이다. 저녁이 내려오는 시간에 맞추어 밤이 그들을 맞아줄 곳으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오가고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들고 한 남자가 트럭에서 내린다. 아직 몇 개의 상자가 그의 트럭 안에 남아있다. 빨간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그 옆을 스쳐간다. 장을 보았는지 비닐봉투를 손에 들고 걸어간다. 그 안에는 파와 양파와 물고기 몇 마리와 냉동만두가 들어있다.     


한 남자가 인형 뽑기 기계 근처를 서성인다. 검정 털실 목도리를 하고 검정 코트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은 그는 꽉 찬 카키색 배낭을 메고 있다. 전봇대 등불 아래 한동안 서 있던 그는 기계의 유리벽 안을 잠시 내려다보다 자리를 옮긴다. 한숨이 입김이 되어 공기 중에 번진다.     


이제는 완연한 밤이다. 저녁은 사이의 시간. 나에게 딱 이만큼의 문장을 허용하는 시간. 그에게는 발자국 소리가 없다. 세상을 한번 확 끌어안아주고는 깊은 밤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text by 엘렌의 가을

images photographed by 엘렌의 가을

2017/12/18

매거진의 이전글 성탄 전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