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ing light
낮의 시간이 조금씩 물러날 때, 저녁은 어느새 내려앉는 눈처럼 조용히 내려온다.
즐거움을 찾아 발랄한 기운으로 소매를 올리던 낮의 발걸음이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그 옷깃을 내린다. 내리쬐던 태양이 그 빛을 거두어가기 시작하면 하루라는 우리의 잊지 못할 눈금이 또 한 칸 앞으로 이동한다. 이때 앞으로, 라는 건 그저 임의의 기준일 뿐, 칸은 채워지지만 그것이 앞인지 옆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낮의 발걸음만이 알 뿐.
겨울이면 사라져 가는 빛은 깊어진다. 눈이 내린 날이면 한층 더. 눈을 머금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지상에는 연한 하늘빛의 그늘이 한 겹 더 드리워져 있다. 구름이 감싸 놓은 공기 중에 아직 눈의 기운이 남아있다. 차갑고, 천천히 떠다니던, 누구나에게 꼭 같은 속도로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 눈꽃은 눈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전체 위에 수많은 알갱이로 번지며 피어날 줄을 안다. 한 송이 눈 안에 셀 수 없는 눈송이가 있다.
저녁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인형 뽑는 기계 안에 켜진 조명이 조금씩 밝아진다. 인형들이 고개 숙인 채 무더기로 쌓여있다. 지나가던 아이가 그것을 힐끗 쳐다본다. 솜이 두터운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꼭 넣고 걸어가던 아이는 이내 걸음을 빨리한다. 손이 묶인 그가 빙판 위에 미끄러질까 잠시 걱정하던 나는, 그에게 장갑을 끼워 줬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가 지나간 길 위로 퇴근시간의 차들이 하나 둘 지나가고 나무들의 가지 위에 쌓인 눈이 바람에 흩날린다. 가끔 마주치던 낯익은 고양이가 솜씨 좋게 질퍽거리는 눈 웅덩이를 피하다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사뿐사뿐 걸어간다.
비상등을 켠 차 안에는 연인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길에 깔린 눈 위로 그 반짝임이 깜빡거리며 그를 재촉한다. 오늘 그들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갈 것이다. 저녁이 내려오는 시간에 맞추어 밤이 그들을 맞아줄 곳으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오가고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들고 한 남자가 트럭에서 내린다. 아직 몇 개의 상자가 그의 트럭 안에 남아있다. 빨간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그 옆을 스쳐간다. 장을 보았는지 비닐봉투를 손에 들고 걸어간다. 그 안에는 파와 양파와 물고기 몇 마리와 냉동만두가 들어있다.
한 남자가 인형 뽑기 기계 근처를 서성인다. 검정 털실 목도리를 하고 검정 코트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은 그는 꽉 찬 카키색 배낭을 메고 있다. 전봇대 등불 아래 한동안 서 있던 그는 기계의 유리벽 안을 잠시 내려다보다 자리를 옮긴다. 한숨이 입김이 되어 공기 중에 번진다.
이제는 완연한 밤이다. 저녁은 사이의 시간. 나에게 딱 이만큼의 문장을 허용하는 시간. 그에게는 발자국 소리가 없다. 세상을 한번 확 끌어안아주고는 깊은 밤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text by 엘렌의 가을
images photographed by 엘렌의 가을
2017/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