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진정 원하는
90년대, 세기말의 낭만이 아직 거리에 남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운 좋게도 내 주변엔 압구정을 주름잡던 소위 '오렌지족' 오빠들이 꽤 많았다. 미대생의 풍족한 과외 수입으로 겨우 '낑깡족' 대열에 합류한 나와 친구들은 그들 덕에 생전 처음 보는 메뉴가 가득한 '아메리칸 캐주얼 다이닝'부터 서울 근교 유명하고 오래된 맛집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어느 늦은 오후, 근사한 드라이브 끝에 들른 유명 오리 백숙집.
남자 셋, 여자 둘, 총 다섯 명이었는데 두 마리를 주문하기엔 과하고 한 마리는 어쩐지 눈치가 보이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때, 오빠 중 한 명이 주문받으러 온 아주머니에게 툭, 하고 멋지게 말을 던졌다.
"아주머니, 저희가 배는 많이 안 고픈데, 이 집 오리가 너무 먹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어요. 딱 한 마리만 시킬게요. 대신 접시까지 핥아먹을 기세로 깨끗하게 비우고 총알처럼 사라지겠습니다!"
그의 당당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멘트에 아주머니는 물론, 우리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갑 사정이나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태연함. 자칫 민망할 수 있는 상황을 유쾌하게 만드는 센스. 그 순간, 나는 그가 정말이지 근사해 보였다. 메뉴판 가격과 내 지갑을 번갈아 쳐다볼 필요 없는 자유로움, 그가 만들어주는 안정적인 세계가 좋았다.
시간은 흘러 철없던 시절은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해졌다.
어느덧 돈과 인생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나이스한 퍼피’부터 ‘스마일 트윈걸’까지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을 꽤 넓게 섭렵했을 무렵,
깨달았다.
그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그의 돈이 아니라,
돈이 있기에 가능했던 그의 '태도'였다는 것을.
자신감과 여유, 그리고 세상을 보는 긍정적인 시선 말이다.
돈 많은 남자, 매력 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진짜 매력은 돈 그 자체가 아닌, 그의 '아비투스(Habitus)'다.
아비투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언급한 이 근사한 단어는 한 사람의 몸에 각인된 취향과 습관, 가치관을 의미한다.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폭넓은 경험과 수준 높은 문화생활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말투,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매너,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유연한 시야로 발현된다.
높은 아비투스를 소유한 남자에 대한
여자의 로망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현상을 만든 것이다.
번쩍이는 금장 벨트를 두르고 두꺼운 금목걸이를 덜렁거리는 의심스러운 자산가 남자를 향해
'신데렐라'가 되고파 기도하는 여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취향이라면 존중한다.)
여자는 올드 머니 룩(Old money look)이 스며든 '귀족 같은' 아비투스를 동경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 둘의 차이를.
훌륭한 아비투스 갖춘 남자는 돈을 '경험의 확장'과 '함께하는 성장'에 투자한다. 그에게 돈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근사한 '도구'다. 그리고 그 여정을 여자와 함께 하려도 한다. (꼭 한 명이 아니더라도...)
반면 돈만 많은 남자는 돈을 '관계의 소유'와 '상대의 통제'에 사용한다. 그의 돈은 여자의 사랑을 확인하는 '목줄'이 되기 십상이다.
"네가 누구 덕에 이런 걸 누리는데…"로 시작하는 대사와 함께 여자에게 폭행을 가하고,
결국 황금 새장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여자, 탈출하려 하지만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힌 체, 다시 끌려간다.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클리셰,
돈만 많은 남자인데 못된 버릇까지 업그레이드된 캐릭터다.
결국, 여자가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지갑의 두께가 아닌 내면의 깊이다. 함께 꿈꿀 수 있는 '부유한 영혼'을 열망하는 것이다.
문득 90년대의 그 오빠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는 더 풍족해진 '한라봉 족'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귤 족'으로 살고 있을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유머와 여유는 지니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그가 '부유한 영혼'을 소유하게 된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돈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개인사 -
참고로 저는 '돈 많은 남자'도 아니고 '돈만 많은 남자'도 아닌, 그냥 '돈 버는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