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산, 그 후 (4)
세상에! 미용실에 안 간 지 벌써 9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작년 8월, 포카혼타스처럼 길어진 머리를 이곳 미국에서 중단발 길이로 잘라냈던 게 마지막 헤어숍 방문이었다. 염색을 안 한 지는 도대체 몇 개월이 지난 거지? 한국에서 결혼식을 앞두고였으니 이미 약 500일 정도의 날들이 흐른 셈이다.
우와, 머리 많이 길어졌다
앞머리라도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임신 출산, 산후조리로 이어지는 약 10개월의 시간을 지내오다 보니 미용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임산부에게는 그저 먼 개념이 되어버렸다. 태아에게 해롭지 않은, 산모의 모유수유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 펌과 염색 시술들이 생겨났다고는 하지만, 타국에서까지 이래저래 불안한 마음을 떠안은 채로 '찝찝하게' 머리를 손질하기는 싫어 일찍이 마음을 접었다. 설상가상, 코로나 시국 이후로 매사추세츠에 문을 연 미용실도 싹 사라져 버렸네? 차라리 잘됐다. 일단 그냥 지내보자고 마음먹었다.
관리를 위한 3단 콤보는
저 멀리 안녕
한 때는 당연히 했던 것들이 '내 거'가 아닌 영역으로 하나 둘 밀려나기 시작했다. 뿌리 염색, 네일케어, 그리고 몸매 관리를 위한 디톡스 주스 정기구독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관리'를 위한 3단 콤보. 적어도 4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3단 콤보 관리를 위해 계획을 짜고 시간을 들였던 것 같은데 내 다이어리에서 잊힌 지 오래.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으나,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 시청자에게 '외면'을 먼저 내보여야만 하는 직업이지 않던가. 아나운서로서 보이는 첫인상에 있어서 결점을 최소화하려 늘 애쓰고 애썼다. 결코 완벽하진 않더라도 두고두고 신경 썼다. 그렇게 신경 씀의 여부까지도 그 직업을 가진 자의 능력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자연스레 내 안의 자질을 드러내고 콘텐츠를 표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혹여 '겉'의 요소가 방해가 되는 건 없을지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곤 했다.
하지만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고, 직업의 테두리를 건너뛰니 관리를 둘러싼 상황은 달라졌다. 아나운서가 아닌 학생으로 살다 보니 딱히 관리가 절실하지 않은 일상의 흐름을 마주한다. 여기에 더하기, 미국 이곳에선 상대적으로 타인의 외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그다지 관심 두지 않는다. 개인차는 있겠으나 한 마디로 남 신경 안 쓰는 문화. 게다가 한국에 비하자면 행동 하나부터 열까지 늘 걱정을 갑옷처럼 껴입은 채 이어가고 있는 격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낯선 나라에서 엄마가 되어야 하는 생애 최고의 이벤트까지 중첩되다 보니, 몰두해야 할 대상들의 미션 난도가 높았다. 자연스레 '관리'의 영역은 점차 내 것이 아닌 듯했다.
우리 산사에 사는 사람들 같지 않아?
아침마다 남편과 눈이 마주치면 자주 주고받는 농담 하나가 바로 이것. 산사의 옷차림을 배배 꼬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보였다. TV에서 우연히 봤던 템플스테이 체험자들의 옷 차림새로. 코로나로 인한 주 정부의 자택 머물기 조치가 길어지면서 편안한 운동복차림으로 재택근무를 이어가는 남편.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아기 돌보기 최적화된 옷으로 무장한 나. 서로를 번갈아 의식하다 보면 그저 웃음부터 터지는 요즘이었다.
집안 곳곳에 놓인 결혼사진 액자 속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화장에 샤랄라 하게 갖춰 입은 서로의 자태가 대단히 생경할 뿐이다. 때때로 집에서도 긴장감을 풀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몸에 딱 맞는 청바지를 입고 메이크업을 할 때가 왕왕 있지만, 거울에 비춰보니 꽤나 오랜 시간 깊게 박힌 초췌함을 감추기에는 이래저래 부족해 보인다. 우리, 사진 속 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 예전처럼 생기 있는 자태로 우리 아기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같이 손잡고 미용실 가는 거야
한국에 잠시 방문하게 되면 가장 하고 싶은 건? 남편과 같은 미용실에 가서 나란히 앉아 머리손질 하기 (육아는 잠시 친정 찬스로 미뤄둘 수 있겠지?). 이젠 임산부 졸업했으니, 염색과 펌에 대한 제약도 사라졌겠다, 마음 놓고 색을 고르고 어울리는 머리스타일 구상하기. 짙어진 머리색을 경쾌하게 밝히고 얼룩진 투톤 머리 가지런히 가다듬기. 좀 더 어려 보이는 스타일이 무엇일지, 동안에 대한 욕망을 괜스레 내보이며 헤어디자이너와 작은 한숨 섞인 고민 나누기.
시간적 여유가 좀 더 있다면 즐겨 찾던 네일케어 숍에 가서 오랜만에 계절감 잘 섞인,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으로 힐링하기. 집에 돌아오는 길엔 유기농 착즙주스 숍에 들러서 살짝 입만 대더라도 쌓인 독소가 쏵 빠져나올 것만 같은 디톡스 주스 한 잔 들이켜기. 군살 없는 몸매를 다시 찾은 듯 상상해보기.
엄마도 관리가 필요해
흐트러진 마음가짐까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지금은 감히 꿈꿀 여유가 없으나, 엄마도 관리가 필요해. 매일 생방송하던 시절의 꼿꼿한 긴장감으로 얼굴과 몸을 매끈하게 가다듬었던 기억들. 그렇게 외면을 정돈하려 고군분투하다 보면 흐트러져있던 마음가짐도 그제야 빳빳하게 날이서서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으니까.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칼에 생활 시시각각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 같고, 바래버린 머리색에 마음마저 알 수 없는 색깔로 물드는 것 같은 요즘, 자칫 잘못하면 '관리' 안 되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앞으로 너와 함께 나아갈 하루하루의 에너지마저 쏙 앗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예전과 똑같은 몸짓으로, 그 자태로 돌아가긴 힘들지 몰라. 그래도 틈틈이 노력해볼게. 차차 엄마도 관리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