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 ABOUT
"너는 참 사소한 일에도 열심이다. 극성이야 여하지간."
배달되어온 무언가를 조립하는 일에 설명서를 A부터 Z까지 읽으며 열중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이모가 기가 찬 듯이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 건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춰서 만들면 되는 걸'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누가 보면 비행기라도 조립하는 줄 알겠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열심히인 내가 재밌고 답답해 보인 모양이다.
"세상에 사소한 게 어딨다고."
작게 구시렁거리면서도 눈길 한번 옆길로 보내지 않고 열심히 하던 일(?)을 마저 끝냈다. 말대꾸를 하긴 했지만 사실 저 '극성'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탁 와서 걸렸다. 언제였더라,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는 책에서 이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을 읽었던 것도 같은데. 쏟아지는 언어의 물살을 가르고 유유히 나아가던 뱃머리에 무언가 탁- 걸린 기분이었다고 했었나. 우리는 하루 종일 쏟아지는 언어의 비를 맞으며 살아가지만 그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겐 오늘 저 단어가 그랬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에겐 유난 떤다는 핀잔 같은 말이겠지만 나는 그 단어에서 온기를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온기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에서의 그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미묘하게 같고 미묘하게 다르다고 대답할 것이다.
될 대로 되라지, 라는 심드렁한 태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뜨거움과 치열함이 있는 삶이 극성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만사 모든 자극에 무뎌져서 무기력한 삶보다는 작은 것 하나에도 열중하고 집중할 수 있는 삶은 '극성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네 삶의 사소한 극성을 잊었기에 종종 텅 빈 공허함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유년 시절을 떠올려 보시라. 그때는 하루가 어찌나 길었던지. 똑같은 24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던 것은 우리가 시공간의 개념이 조악한 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사소한 의미 있는 것들'로 꽉 채워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린 시절 내 눈앞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없었다. 벽돌담 사이를 비집고 고개를 비죽 내밀고 있는 풀 한 포기 조차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몇 분이고 관찰해도 질리지 않는 경이로운 관찰의 대상이었으니까.
하루가 쏜살 같이 지나가버린다고 느끼는 것은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속은 가속이 붙는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어쩌면 일상의 소소한 순간과 장면들인지 모른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극성을 떨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하루를 구성하는 작은 조각조각 하나하나 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사소한 게 어딨다고?"
완성된 조립품을 이리저리 돌려서 감상하며 괜스레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 같은 말을 한번 더 지껄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