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삶의 의지가 아니라
생존하려는 의지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7시간 정도는 자야 하는 사람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데
언제나 시간적 여유는 없다.
두 아이 등교시키고 나면
간간이 동아리 모임과 수업을 듣는다.
모임을 마치고 선생님들과 밥이라도 여유롭게
먹고, 차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이어서 바로 수업이 있기에
내가 누릴 호사는 아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면
수업 시간 안에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야 한다.
딱히 정해진 쉬는 시간 없이,
두 시간, 세 시간 수업을 내리 한다.
설렁설렁할 수가 없다. 그냥 성격이다.
나는 엔티제다.
수업을 마치면 저녁 준비에 이제
내 아이들을 챙겨야 할 시간이다.
그나마 이 시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남동생이 준 식기세척기를 들인 덕분이다.
나는 상당히 손이 빠르다 생각했는데,
아무리 빠르다 한들 시간을 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집안일이었다.
그 시간을 기계로 대체해 보니 알겠다.
심지어 내가 하는 설거지보다도
신뢰가 가는 건 유독 뽀드득거려서일까.
이때부터 나는 다시 바빠진다.
하루치만큼의 비타민을 매일 섭취하듯
-하지만 거르기 일쑤-
꼭 그날 하루 읽어야 할 책과 글이 있다.
체할까 무섭게 빨아 들인다.
'활자중독'일까 싶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고 후다닥 나온다.
아직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외면한다. 더 부러워질까봐.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딸에게 전화가 온다.
"엄마, 언제 와?"
후다닥 노트북을 덮고 가방을 싼다.
발걸음이 부산스러우니, 그저 다른 이용자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집에 큰 일이 난 것처럼 발걸음이 어찌나
저벅저벅 되는지.
두 아이가 제법 커서 이런 아쉬움들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몇 장의 책을 읽었고,
또 한 편의 글을 썼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그 안에 내 삶의 의지가 녹아 있었고,
그건 곧 생존에 대한 의지였다.
내 삶의 존재 이유는
오늘 읽은 책과 하얀 모니터 배경에 적어 내려가는
이 글자들이 곧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