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읽는 사람은 결국 쓰게 된다

by 엘샤랄라
필사백-Day_64-001 (1).png

29살에 결혼해서

30살에 아이를 낳고

이후 근 10년 동안, 나는 정말 오직

나의 시간을 두 아이 양육에 쏟아부었다.

두 아이 양육에 쏟아부었다는 말은

그저 물리적으로 아이를 케어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온 정신을 쏟았다는 뜻이다.

그 와중에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중, 고등학교 때에는 도서부 활동을 하면서

학부 때에는 학교 도서관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는 주로 사서 읽었다.

공부하다 힘들고

사회생활 하다 힘들고

아이 키우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저 붙잡고 매달린 건 책이었다.


오직 나를 향상시키고 의지가 되는 대상이

책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에는

막상 책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책에 쓰인 작가의 블로그 주소를

기웃거렸고, 그렇게 하나 둘 그들에 대해 알아갔다.

그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는 온라인 세계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나 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이며 신문이며 가리지 않고 읽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세상은 나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이전부터 항상 읽어왔기 때문이었겠다.


읽고 또 읽어 왔던 시간들이 어떻게 엮여서

나의 삶에 그 모습을 드러낼지 나는 알지 못했고,

그저 마냥 좋아서 읽었을 뿐인데

이제는 그 시간들이 글로 엮인다.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의 전환은 순식간이었지만,

어쩌면 나는 십 대 시절부터 이미 나의 운명을

닦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문장을 다듬고, 다시 다듬어서

더 정교하고 분명하게 나의 생각을 오롯이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몸부림은 칠지언정

무언가 끼적이며 쓰고 있는 내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중학교 2학년, 세 명의 친구들에게 시를 선물하며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었던 일,

몇 번의 퇴고를 거쳐 과학독후감을 써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일,

시험 답안지에 쓴 짧은 글짓기로

학년 선생님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일부터

써야만 하는 운명은 이미 나를 지배해 왔다.

그리고 오늘, 그런 나의 작은 재능을 알아봐 주고

잘 쓰든 못쓰든 쓰기 위해 새벽을 깨운다.


쓰는 인간으로 전환하여 살고 있는 이 삶이

그저 한 땀 한 땀 모여서 또 어떤 운명을 그려낼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즐기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니체가 말하는 위대함을 논하기 앞서, 우선 살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