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단어, 절망.
섬네일을 만들어 놓고
글을 시작하지 못하기를 며칠,
그래도 어떻게든 써야 할 것 같아서
창을 열어 놓았다.
내가 나의 절망에 갇혔을 때,
다른 어떤 것은 보이지 않았기에
나의 삶은 마치 얇은 막이 씌워져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때로는 분간하지 못해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더 나는 탈출구를 찾았는지 모른다.
살아지는 대로 살면 살 수도 있겠지만
또 그렇게 안되니
매사가 괴로웠다.
그러한 '절망'의 결박으로부터 이제 좀
나를 해방시키고 나니,
나 또한 살기가 완전히 편하다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정도면 괜찮다'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그러한 깨달음은 더 화려하고 풍족한 삶에 대한
다다를 수 없는 욕망 속에 허우적 대기보다
나의 수준에서 보듬을 수 있는 행복을
자각하는 것이 절망이라는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각자가 품고 있는 절망의 크기는
생각하기 나름으로 얼마든지 줄일 수 있고,
키울 수도 있다.
어쩌면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절망을 소멸시키기 위함이었나 싶기도 하다.
이를 위해 어쩌면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 괴테가 보여주고자 했던
'행동하는 인간'이 됨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 말한 괴테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발버둥 침으로
절망을 달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해 보고,
이별도 해보고, 지지고 볶고 살아보며,
아이들도 낳아 키우는, 누구나 하는 것 같아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면면들이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단련의 시간이었던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인류 생활사의 쳇바퀴 속에 기꺼이 나도
함께 바퀴를 굴리는 그 뻔하디 뻔한 삶을
마음껏 누려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