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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용 사과만 사 오는 남자

정반대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합니다 #3

by 엘슈가

연애할 때 누군들 별도 달도 따주지 않으랴마는 남편은 과한 편이었다. 매일이 야근인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본인은 퇴근하고 집에서 쉬다가(분당) 내가 퇴근할 무렵(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 삼성동 빌딩숲으로 차를 몰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논현동) 집으로(분당) 돌아가곤 했다. 데려다주는 시간은 10분도 안 걸리지만 오가는 시간 포함 1시간이 걸리는 생활을 두고 농담처럼 ‘이렇게는 못살겠어서 청혼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물을 줄 때도 과한 편이었는데, 다른 선물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기억하는 선물이 하나 있다. 바로 '떡'이다. 떡이 뭐가 그리 과한지 궁금하실 터. 떡이 좀 많았다^^ 여자친구가 떡을 좋아하니까 고급스러운 떡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싼 걸 달라고 했나 보다. 그 떡은 바로 '이바지용 떡'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20만 원 정도는 했으리라. 차로 데려다주면서 고급 보자기에 싸인 떡을 안겨주며 ‘잘 자’ 양반집 도련님처럼 흐믓한 표정을 짓고 돌아갔다.


내가 떡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양의 떡을 혼자 먹을 수는 없었기에 떡 선물을 받은 다음 날 아침 부서는 잔칫날이었다. 2주에 한 번씩 받았으니 2주에 한번 돌아오는 잔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은 짜장면, 새우깡, 초코파이를 제일 좋아하면서도 남들에게 무언가를 줄 때는 최고 좋고 비싼 걸 선물하곤 했다. 그 점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고 멋있었다. 결혼 전까지는.


결혼하고 그의 속사정을 알고 나서는 매일이 속이 탔다. 지인과 밥을 먹을 때도 '내가 낼게' 선배랑 밥을 먹을 때도 ‘형님 제가 내겠습니다!’ 그의 지갑은 늘 열리기 바빴다.


어느 봄날이었다. 후배네 식구와 근교로 여행을 갔는데 출발하면서 돌아오기까지 거의 모든 비용을 그가 냈다. (비용 계획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출발하며 들린 첫 휴게소에도 각자 구매한 걸 각자 지불하면 되었을텐데 따라다니면서 기여이 모든 밥값을 냈던 것. 그렇게 그의 지갑은 모터가 달렸는지 시도 때도 없이 열리곤 했다. 나도 남에게 베푸는 게 좋다는 걸 안다. 그가 하는 일이 금융계 고객을 대하는 일이다 보니 몸에 배어서라고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지갑은 너무 자동이었던 것.


한 10년 같이 사니 어느 정도 포기가 되더라. 말하면 다투게 되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로.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고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도 가계부 경제에 눈을 뜨기를 바랐다. 나만 알뜰하게 지출을 관리하는 건 밑빠진 독에 콸콸 물붓기 같아서. 월말이 되면 ‘그 돈 다 어디 갔어?’하는 말에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한 번은 꼭 사과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마트에서 사과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 잘했지?’ 표정으로 그가 장바구니에서 꺼낸 걸 보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3개. 위용을 뽐내며 들어있던 건 바로 제수용 사과였던 것. 제사 지낼 때 쓰는 사과이니 얼마나 최상급일까? 그렇다면 가격도 그에 맞게 책정되었을 것 아닌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오빠, 이 사과 뭔 사과인지 알고 산 거야? 그는 해맑게 대답했다. '아니~ ‘ ‘자 잘 들어~ 이건 제수용 사과야. 그냥 집에서 깎아 먹는 사과가 아니라고. 그리고 가격도 보통 사과에 3배 정도 한다고!‘ 그도 알건 알아야 할거 아닌가.


이런 나의 단도리에 그도 신혼 때와는 달라졌는데 부동산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며 지켜 본 그는 여전했다. 손님을 대할 때나 협업하는 부동산 대표를 대할 때 늘 좋은 것, 맛있는 것, 고급스러운 것을 대접하곤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도. 한 번은 한우 곱창전골집을 갔는데, 자꾸 괜찮다는데 2인분을 더 시켰던 것. 나중 그 사장님으로부터 이런 후문을 들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그날 집에 걸어가느라 혼났다고.


남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당신도 좀 셈을 하면 좋겠다고. 마냥 퍼주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내 말에 돌아온 남편의 대답은,


"언젠가 다 돌아오는 거야. 어디 안 가. 내가 이렇게 하는 거 나중에 다 돌아온다고. 몰라줘도 돼. 나는 이게 편해"


남편이 퍼주면 나는 뒤에서 수습하고 너무 과하다 싶으면 한 번씩 브레이크를 걸고 수레의 앞바퀴와 뒷바퀴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돌아오긴 할까? 의문이 들다가도 남편이 쌓은 덕 어디 안 가겠지 생각하면서. 부부 중 한 명은 셈 없이 그렇게 살아도 뭐 그럭저럭 잘 굴러가니까 라고 위안 삼으면서. 그런 남편 덕에 최상급 제수용 사과도 아무렇지 않은 듯 먹는 삶이니까. 이만하면 꽤 괜찮지 않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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