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1)
쌀쌀한 새벽 공기에,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옷도 그대로 껴입고 잔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침낭만 후루룩 접어서 밖으로 나갔다.
씻지 못했지만 히말라야 공기가 맑아서인지 찝찝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돌길 위에는 아침 산책을 하는 조랑말들이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누굴까, 둘러보다가 나는 건너편에서 여물을 주는 현지인과 눈이 마주쳤다.
말들이 밥을 먹는 방식이 특이했다.
주인이 여물을 봉투에 담아 목에 걸면, 말이 목을 치켜들고 여물을 삼켰다.
마치 입마개를 씌우는 것 같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 말들은 목줄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도 1000미터의 조랑말이라니! 어떻게 올라온 건지, 매일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키워진다'는 표현보다 여기 '산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아침은 간단한 빵이었다.
채워진 게 별로 없는 빵 곁에는 항상 꿀과 잼이 나온다.
잼은 사과와 망고 등이 섞인 아주 이질적인 맛이었다. 꿀은 한국 것보다도 점도가 높은, 버석한 가루가 있는 진짜 꿀이었다. 나는 신선한 이 꿀이 마음에 들어 종종 잔뜩 발라먹곤 했다.
숙소를 떠난 시간은 오전 9시 경.
우리는 넓은 흙비탈길과, 잘 닦인 돌계단을 주로 걸었다.
처음에는 '스틱이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가끔 지름길로 갈 때에면 발 딛기도 힘든 경사진 풀길이 나오기도 했다. 스틱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기어갔을 것만 같은 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예상치 못한 동행을 만났는데. 그는 (아니 사실 그녀일지도 모르겠다) 하루종일 널부러져 자는 우리 집 고양이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부지런한 종임이 틀림없었다.
비쩍 마른 검은 강아지가 아침 9시부터 우리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걷고 있는 것이었다.
길이 갈리면 그는 우리와 다른 길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아 드디어 제 갈 길 갔나보다' 생각할 즘이면, 강아지는 어디에선가 다시 나타나 우리와 함께 걸었다. 아무래도 하루이틀 경력이 아닌 듯했다.
동생은 강아지한테 '탄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까맣게 탄 콩 색깔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 이름이 이상하다고 동생을 놀렸지만, 더 좋은 이름을 찾지 못해 결국 탄콩이로 낙점이 되었다.
탄콩이는 우리에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누가 고도 1500미터 히말라야에서 강아지와 함께 걸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볕도 적당히 드는 완벽한 날이었다.
쉬지 않고 걷자, 금세 더워진 우리는 잠시 멈춰 외투를 벗었다.
하지만 덥다는 건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얼어붙은 샘물과 엷게 쌓인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듯한 햇볕 아래서 얼음을 보는 기분은 묘했다. 순간의 괴리감이 내가 고도 1800미터에 서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고든 아저씨는 이 물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방인이기에 탈이 날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아저씨는 자신의 얘기도 해주었다. 그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만 200번 정도 다녀온 베테랑이었다.
"그럼 안나푸르나 정상도 올라가봤어요?"
동생이 해맑게 물었다. 그러자 '나는 죽고 싶지 않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안나푸르나는 고도 8000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데다가 등정 사망률이 38%*라고 한다.
'죽고 싶지 않아'라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8000미터급 14좌 중 1위다. 참고로 에베레스트의 등정 사망률은 5.7%이다. 물론 산마다 개발된 루트가 다르고, 동계 등정 자체가 금지된 곳들도 있어서 사망률 자체로만 위험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안나푸르나가 '가장 위험한 등정 코스 중 하나'라는 말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얼마간 우리는 고든 아저씨를 잘 따라 걸었다.
탄콩이 역시 아저씨 뒤에 바짝 붙어 가고 있었고. 나도 부지런히 탄콩이 뒤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 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만 갔다.
우리는 종종 멈춰 동생을 뒤돌아보았다.
고든 아저씨에게는 너무 느린 속도인지, 이미 MP3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건 사실 이상한 현상이었다.
동생은 태권도 4단**이다. 체육학과를 준비했었고 외향적인 편이다. 반면 나는 운동과는 아주 거리가 먼, 전형적인 집순이다. 그럼에도 산은 내가 더 잘 타는 듯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둘이 북한산에 연습 산행을 갔을 때에도 내 속도가 동생보다 훨씬 빨랐으니.
**태권도 4단부터 소위 '태권도장'을 차릴 수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산을 훨씬 즐기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산에는 길을 선택하는 맛이 있다. 이쪽 돌을 밟느냐, 저쪽 돌을 밟느냐에 따라 내 다음 걸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같이 가이드가 있는 상황에서는 얘기가 조금 다르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내려다보면 나는 벌써 바닥이 안 보일만큼 아득하게 올라와 있다. 걷다가 힘들면 조금 쉬어가도 괜찮고, 잘못 길을 들어서면 되돌아가면 될 일이다. 맑은 공기와 작은 산동물은 덤이고.
내게 산은 그런 재미가 있었다.
20년 넘게 "산 VS 바다"에 대한 내 대답은 '바다'였지만. 이번 여행이 끝나면 그 답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작은 마을에서 쉬어간 이후, 탄콩이는 더 이상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후에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그는 다른 등산객들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대신 다른 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 떼, 염소 떼, 조랑말 떼 등등.
길이 넓든 좁든, 가파르든 아니든 그들은 우리 옆을 지나갔고 그때마다 우리는 잠시 멈춰야 했다***.
***야생 동물들은 아니지만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과 다르기에 조심해야 한다. 길 안쪽으로 비켜야 굴러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정상을 향해 갈수록 등산객의 수도 점점 많아졌다.
새해맞이를 위해 올라가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하산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비탈길을 내려오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서로의 국적에 상관 없이 'HELLO'라고 경쾌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같은 길을 오르내린다는 이유만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등산객만의 규칙, 혹은 관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하산을 하면서 이 인사는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얘기는 하산하는 D+7편에서 더 자세히 하려고 한다)
처음에 난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몰라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여러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어느새 함께 '헬로우!'를 외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번갈아 나오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등산의 재미를 더했다. 오래된 나무가 푹 꺾여 동굴 같은 공간이 나오기도 했는데, 밤이 되면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 법한 곳이라는 상상도 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폐활량이 더 많을까? 고산병도 없을까? 그럼 오히려 평지에 갔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서너시간 동안 걷기만 하니 소소한 유희거리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 다음 휴식 장소는 고도 2400미터였다. 우리는 포도당 사탕을 꺼내 고든 아저씨에게 건넸다.
그 때 한 무리의 중국인이 다가왔다. 우리의 국적이 궁금했던 것 같다****.
****대개 외국에서는 화장법과 옷차림으로 한중일을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추리닝에 노메이크업 차림이었으므로 국적을 판별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어느 도시에서 왔냐고 되물었다.
서울이라고 대답하자 '남한?'이라는 확인질문이 돌아왔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으니 우리가 북한에서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남이냐 북이냐는 질문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먼 나라도 아닌 중국에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니 놀라웠다.
벌써 시간은 정오가 가까워 있었다. 우리는 한 식당에 멈춰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식당 한쪽에는 전통옷을 입은 할머니가 채소를 씻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난로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제 같은 롯지에 묵었던 태국 부부가 식당에 들어왔다.
식당 밖으로는 무수히 많은 계단식 논이 보였다.
겨울이라 싱그럽진 않았지만, 그야말로 교과서에서 보던 고랭지인 듯했다.
깎아지른 산비탈 사이에 겹겹이 쌓인 갈색 토양을 보자니 꼭 잃어버린 문명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핵폭탄이 터져도 소식조차 모를 것만 같은 곳이었다.
"근데 이 스파게티, 손으로 두드려서 면을 뽑는거야?"
이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한국만큼 음식이 빨리 나오는 나라는 없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이 식당은 속도가 너무 느렸다.
문제는 추위였다. 땀이 식으면서 급속히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고, 미리 주문한 따듯한 음료는 비운지 오래였다. 우리는 결국 핫팩을 꺼내서 열심히 흔들었다.
고든 아저씨가 재촉을 하자 기다린지 1시간이 조금 넘어 음식이 나왔다.
그는 우리를 섬세히 배려해주는 포터였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도 그렇고, 그는 끼니때마다 꼭 수저를 부엌에 가서 다시 씻어왔다. 오래 한국인과 일하다보니 생긴 습관인 것 같았다.
음식은 스파게티보단 볶음면에 가까웠지만 고추맛 소스와 함께 먹으니 맛있었다.
히말라야에 있는 동안 스파게티만 먹었다는 사람도 보았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긴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1시간 반쯤을 더 걸었다.
지옥의 계단이 한 번 나왔고, 비교적 평지를 따라 걷자 드디어 '웰컴투푼힐'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게이트 뒷편으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푼힐 전망대와 가까워지면 어렴풋하게나마 산맥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곳은 오히려 풀만 무성한 산 속 마을이었다.
고든 아저씨는 우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팀스퍼밋 체크를 받으러 갔다. 드디어 커피와 함께 쉴 수 있겠구나, 하며 무릎보호대를 풀던 찰나.
고든 아저씨가 다시 출발하자는 말을 했다.
'이런, 다 온 게 아니었어?!'
그렇게 약 6시간 가량의 트레킹 끝에도 도착지점을 구경하지 못한 채, 우린 다시 배낭을 매야 했다.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변명을 조금 하자면, 진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리고 있어요! 그래도 올해 안에 좋은 소식이 생길 것 같아 더 부지런히 움직이려 합니다. 당분간은 연재 요일을 정하지 않고 되는대로 틈틈이 써서 올려보려고 해요. 꾸준히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