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ㅇㅅㅇ Apr 07. 2020

[D+4] 고산병, 한국인, 그리고 쏟아지는 불빛

2019년 12월 30일 (2)

계단은 내 전문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언덕에 있던 탓에 나는 6년 간 등교길을 계단과 함께 했다.

그러나 2시간 동안 덜컹거리며 달려온 것이 문제였을까.

채 20분도 되지 않아 속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주저앉고 싶을 때 즘 작은 마을이 나왔다. 

원색으로 색색이 칠해진 마을이.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히말라야에는 왠지 사람이 살지 않을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숙박업자들을 제외하고라도, 이곳은 누군가에게 '삶의 터전'임이 분명해 보였다.


고든 아저씨와 동생은 쉬지 않고 걸었다.

맨 뒤에 선 나는 사진을 찍으며 부지런히 따라가야만 했다. 집의 모양새와 축사, 담벼락 생김새를 구경하는 건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다.




20분 쯤 더 갔을까. 숨이 차, 더 이상 못 갈 것 같은 순간 다 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왼편에 2층짜리 숙소가 있고, 오른편에 공용식당이 있는 롯지였다.

문이 열린 식당 안쪽으로 재윤님과 달님이 보였다.

반가움에 손을 흔드는 그 순간.. 동생이 쓰러졌다.


*울레리에서 반단티까지 약 40분 소요한 셈. 이 곳에서는 숙소를 '롯지'라고 부른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민박과 가장 가까운 개념의 숙소다.



동생의 얼굴은 백짓장같이 질려 있었고, 주저앉은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고든 아저씨가 침착하게 다가갔다.

둘은 '물을 마셔야 돼', '아냐 아무것도 안마실래'를 반복하며 힘 없는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결국 우리의 부축을 받으며 우리가 묵을 방까지 겨우 올라갔다.

힘이 풀려 한 번은 복도에서 철푸덕 쓰러졌으니, 그야말로 질질 끌려간 셈이었다.


'나 내려갈래. 언니 혼자 저 분들이랑 올라가.'


그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상상했다.

'재윤님, 달님과 함께 2박 3일로 빨리 트레킹을 끝내버릴까. 동생은 내일 아침 차편으로 하산시키고..'




동생은 금방 잠들었다.

고든 아저씨는 오래 차를 타서 멀미 때문일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확실히 동생은 멀미가 심한 편이긴 했다.


하지만 고산병은 가볍게 무시할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나 역시 7년 전 쯤, 융프라우에서 잠시 고산 증세가 왔었는데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우선은 그녀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며 식당 안에 있기로 했다.


식당 앞으로 당나귀가 지나갔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당나귀 딜러버리 서비스'가 있다. 물건은 물론 사람까지 태우고 등산도 가능하다. 


재윤님과 달님은 그들의 '힙한' 포터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산하면 같이 밥을 먹자며.

(우리의 고든 아저씨가 푸근한 옆집 아저씨라면, 이들의 포터는 스타일부터 말투, 좋아하는 음악까지 모두 클럽에서나 만날 것 같은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달님이 동생 괜찮냐며 걱정을 보태주었다. 사실은 자기도 방금까지 토할 것 같았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다는 위로를 덧붙이면서. 



입맛이 도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없이 앉아있으려니 그것대로 허전했다.

가벼운 팬케잌을 먹으며 나는 재윤님, 달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양식이 아닌, 전 형태의 반죽 팬케잌이었다.

나와 재윤님은 질색을 했지만 달님은 맛있다며 연신 꿀을 찍어 먹었다.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나는 두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커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달님은 '자기!'라는 표현을 자주 썼고, 마침 재윤님은 숏컷에 여자에게도 인기가 많을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럴리는 없겠다는 결론에 다달았다.

둘은 생활반경이 너무나 달랐고, 서로에 대해 섬세히 아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진실이 무엇이든 두 사람의 케미는 확실히 한국에서 보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당보충을 해야 한다며 우리에게 초콜릿 한 박스를 넘겨준 두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다음 장소를 향해 떠났다**.


**푼힐까지 3박 4일 코스로 가는 우리 둘은 울레리에서 1박을 했다. 하지만 둘은 2박 3일 일정이라, 고레파니까지 더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한숨 자고 일어난 동생은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장 내려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괜찮으니 끝까지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언니한테 뭐라고 못하겠다."


평소의 나는 '일단 부딪혀봐, 될대로 되라지' 식의 사람이었고, 동생은 '하나부터 열까지 대비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6박 7일 ABC코스로 가자는 나를, 등산의 '등'짜도 모르는데 말이 되냐며 푼힐에 오자고 한 것도 동생이었다.

게다가 요즘 한창 숙소에서 짐정리, 돈정리를 안하고 잔다고 동생이 잔소리를 하던 터였다.


진정한 위기의 순간은 어차피 예상 못한 때에 온다는 것을 그녀가 어렴풋이 깨달은 걸까.

어쨌건 이렇게 죽도록 힘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경험은 그녀에게도 오래 기억에 남을테지.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시간은 아직 오후 3시였다.

하루종일 할 게 없어진 우리는 잠시 줄줄이 늘어선 산을 구경하다가 노트와 펜을 들고 나왔다.

선선한 바람에 네팔 국기가 소리도 없이 살랑였다.

동생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글을 썼다.

고든 아저씨는 식당 안에서 현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듯했다.



롯지에는 태국인으로 보이는 부부가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하산하는 등산객이 한 무리 지나갔다. 그 사이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괜히 반가워 얘기라도 꺼내볼까, 하다가 꺼낼 말이 없어 조용히 그 행렬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40대 혹은 50대인 그들은 동호회에서 온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영어로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우리가 한국말로 대답하자 양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알고보니 그 분은 꽤나 유명한 산악인이었다.

검색하면 포털사이트에 기사가 나오는, 그런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초코바와 비타민을 가득 챙겨주었다.

사진을 함께 찍었고, 한국에 오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도 남겼다.


진정한 산악인은 '등반'을 하지 '트레킹'을 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명한 분이 초보자 코스인 푼힐에 어쩐 일로 오신 건지 여쭤보았다.

순간 불쾌한 질문일까,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저 이런 궁금증이 들었을 뿐이다: 수학의 정석을 풀 수 있는데 왜 중학 수학 문제를 푸는 이유가 있나요?


그러니까, 이런 나도 여기 오면 힘들어. 막 죽겠고 그래. 그니까 나는 왜 힘들지 하지 말고, 힘내서 올라가고.



물을 많이 마셔야해, 체온을 따듯하게 유지하고, 고산병에는 진저레몬티가 좋고..

걱정어린 잔소리들이 이어졌다. 그건 기분 좋은 살가움이었다.


연결고리가 없어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낯선 사람에게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그리고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건. 따듯한 일이었다. 

일상에서 타인이란, 지하철에서 살이 닿기만 해도 잔뜩 예민해지는 존재이기에.




그들이 내려가고, 우리는 잠시 숙소로 올라가 쉬었다.

하지만 냉기 때문에 오래 있지 못하고 금세 식당으로 내려왔다.


식당에는 한가운데에 난로를 두고 모두가 빙 둘러 앉아 있었다.

모두가 쫓기는 일 없이, 어쩌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히말라야 산 중턱에 앉아 있었다.

부족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곳에 존재하기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평화였다.

괜시리 모두가 가족 같이 느껴졌다.


카레와 야채국. 고산지대의 야채라 그런지 정말 싱싱했다.


저녁을 먹으며, 인도 동행을 구하는 글을 올렸다.

비록 식당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지만 히말라야에서도 와이파이는 잘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고도 3200미터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후식으로는 따듯한 음료를 시켜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은 생각보다 더 쌀쌀했다.

어느새 새까매진 네팔의 밤하늘에는 별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불빛은 산 아랫쪽에도 가득 수놓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수많은 불빛들이 집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벌써 카메라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휴대폰 카메라에는 이 장면이 담길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핑계로 언젠가는 히말라야에 다시 올 수 있지 않을까.


히말라야에서의 첫 1박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평화로운 그들의 생활 방식이 좋아, 어쩌면 한국인보다 더 행복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냉수 때문에 씻기 어렵다는 점만 뺴면 말이다.



쓰다보니 다시는 세계여행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작 4달 전의 이야기인데도요..! / 이 매거진은 매주 일/화/목 자정(월/수/금이 되는 12시)에 연재됩니다
이전 08화 [D+4] 지프로 히말라야 등반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