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2)
고즈넉한 포카라 호수 뒤로 게스트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여전히 차와 오토바이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내며 달렸지만, 카트만두에 비하면 아주 고요한 편이었다. 8시간 동안 옴짝달싹도 못한 탓에 방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부산스럽게 등장한 사장님 탓이었다. 일단 무거운 배낭은 여기 내려놓고, 잠깐 앉아보라는 말이 들렸다.
거실처럼 꾸려진 1층에선 이미 여행자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인민박의 모습이었다.
사장님은 여자치고도 작은 키에, 다부지고 까무잡잡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선명하고 기운 있는 눈이 왠지 모르게 부엉이를 연상시켰다.
등산 준비는 다 했어? 팀스 퍼밋은? 포터는 어디 업체에서 구했니?
엉거주춤 앉자마자 장전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물론 우리는 등반할 코스와 준비물을 미리 조사하고 왔다. 현지에서 발급받아야 할 서류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일단은 도착해서 여유롭게 준비하자는 생각에 아무것도 안한 우리였다.
내일 출발할 예정임에도 아직 팀스 퍼밋*을 받지 못했다는 말에 사장님은 기겁했다. 그와 동시에 일사분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짧은 통화 후에 누군가가 와서 우리의 여권을 수집해갔다. 퍼밋 작업을 하러 간 그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어떤 과정으로 등산을 하게 될지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지프를 함께 탈 동행도** 정해졌고 10년이 넘는 경력의 포터***와도 매칭이 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의 견적표가 완성되었다.
*팀스 퍼밋은 히말라야에 입산하기 위한 허가증이다.
**등산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지프를 타고 가야한다. 지프를 렌트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통상 4~5명이 모여서 출발한다.
***포터는 등산할 때 짐을 대신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가이드와 포터를 각각 고용하는 경우도 있고, 노가이드 노포터로 등산하는 경우도 있다. 대중적인 코스를 트레킹 할 때에는 '포터 겸 가이드' 한 명만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불안했다. 빠른 건 언제나 탈을 낳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비교한 뒤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장님은 틈을 주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장님에게서는 흔한 사기꾼들과는 다른, 더 많은 힘이 보였다. 전화 한 통이면 팀스퍼밋 대행업자가 오고, 포터가 오고, 환전 업자가 왔다. 순간 영화 '이끼'의 이장이 겹쳐 보였다.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 민박 사장님인 이 사람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녀에 대한 판단은 후일에 가서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 얘기는 D+8 편에!)
어쨌건 우리는 사장님 덕분에 내일 당장 히말라야를 향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장갑이니, 물통이니, 무릎 보호대니 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주었다. 그리고 5시에 포터와 사전미팅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10년 넘게 일하면서 여자 등산객한테 불미스러운 짓을 한다거나, 그런 적 없었으니까 걱정 말고'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쪼록 정신 없는 등산 준비를 마치고, 한인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후에야 우리는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한식이 생각나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한식은 언제나 옳았다.
포카라호수는 네팔 내에서 유명한 관광지다.
히말라야 트레킹 전, 혹은 후에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고 호수 자체로도 운치가 있는 장소이다.
일정을 미루고 이곳에서 더 머무는 관광객도 있다고 하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내 눈에 보이는 포카라 호수는 생각보다 아주 심심했다.
그 심심함에 며칠을 조용히 쉬어갈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명성에 미치는 매력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짐을 풀었다.
오후 5시, 우리는 포터 아저씨와 간단한 미팅을 했다. 고든 아저씨(가명)는 포터 일을 10년 넘게 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살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에 가까웠다.
빨래를 맡긴 후, 우리는 간식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했다.
관광단지라 그런지 작지 않은 마트였는데도 물가가 비쌌다.
초콜릿은 오래 되었는지 허연 가루가 얹혀 있었고. 아이스크림은 생크림 맛이 너무나도 많이 났다.
디저트마저 한국 것이 맛있다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의 끝에서 우리는 드디어 핫샤워를 할 수 있었다. 네팔에서 처음으로 느낀 '뜨거운 물'이었다.
트레킹을 하는 3박 동안은 또 다시 느낄 수 없는 온도임이 틀림 없었다.
내일 시작될 히말라야 트레킹에 빠뜨린 게 없길 바라며.
나는 꽤나 포근한 밤을 보냈다.
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이름은 가명임을 밝힙니다. '세계일주 실패하다' 매거진은 매주 일/화/목 자정 (월/수/금이 되는 12시)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