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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ㅇ Apr 25. 2020

[D+5] 고도 3000미터 히말라야 위의 파티

2019년 12월 31일 (2) 


산 위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고도 2900미터 위의 마을에는 겨울임에도 초록빛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언덕을 반쯤 채운 나무들은 이미 한기에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초원'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곳이 나왔다. 짧고 노란 풀들 사이로 돌부리만 듬성듬성 보였다. 우리는 그 길을 40분 쯤 더 걸어갔고, 길의 끝에서 경사 급한 언덕을 마주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고든 아저씨가 저길 보라는 얘기를 했다.

등산스틱에 의지하며 겨우 발을 딛은 나는.. 고개를 들었을 때 말 그대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설산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구름을 뚫고 솟아난 산은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아름답다, 신비롭다는 말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란다니. 종교를 가질 수 밖에 없겠어. 도저히 인간의 이성이 최고라 자신할 수 없을, 그런 풍경이야



나는 정말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생은 별난 소리를 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말이다.

카트만두에서 본 어떤 영적인 분위기는 네팔의 이런 환경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펼쳐진 등산길은 좀 더 험난했다.

푼힐이 코앞이라는 걸 증명하듯, 걸음마다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설산을 본 탓인지 '이런 게 진짜 등산이지!'하는 뿌듯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드디어 목표했던 고레파니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산은 지상에서보다 크게 보였지만 어쩐지 더 멀어 보였다. 

구름에 쌓여 아득히 먼 그 풍경이 마치 CG를 보고 있는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공룡의 등 같은 산등성이가 굽이굽이 전경을 채우고 있었고. 원색 지붕의 작은 마을이 초록빛 나무들과 함께 화룡점정을 장식했다. 빨간 집과 푸른 나무, 노란 흙과 검은 바위, 흰 눈 뒤의 하늘. 

다시 곱씹어볼수록 경이로운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늦게 올라온 편인지 이미 숙소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간단히 짐을 푼 후, 우리는 밖으로 나가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태권도 4단인 동생은 산맥을 배경으로 옆차기를 했다. 가는 곳마다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을 거라면서.



한껏 체력을 쓰고 숙소로 들어오자, 식당에서 보내는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방에 난방이 안 되는 이곳에서는 모두 식당에 모여 낮에는 사람의 온기로, 밤에는 난로불로 다 같이 추위를 나야만 했다.


앉아있으니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보였다. 가끔 전문 짐꾼이 지게를 매고 올라오는 것도 보였다. 

저쪽편에서는 호텔 같은 걸 하나 새로 짓는지, 건설 공사도 하고 있었다. 철골 구조물에 조명을 달아놓은 걸 보니 럭셔리한 건물을 지을 요량인 것 같았다.



우리가 내일 올라가는 곳이 어디에요?


고든 아저씨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말도 안 되게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래 저 쯤 어딘가려니'하며 애써 그의 손가락을 외면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다 온 건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다.


방 침대에서 커튼을 걷을 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히말라야가 보인다!!


한동안 우리는 각자의 폰을 들여다보느라 말이 없었다.

고도 3000미터에서도 와이파이가 되는 것이었다!

눈앞에 히말라야를 두고도 폰을 본다니 좀 아이러니한 것 같았지만. 어쨌건 하루종일 앞만 바라보며 멍을 때릴 순 없지 않은가.


나는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다운 받고, 사진을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고, 새해 인사도 했다.

올라갈 만 하냐는 지인의 물음에 '이 정도면 아픈 사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라는 답을 내놓았지만..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답을 번복했다*.


*다음 편에서 상세히 적겠지만, 고레파니부터 푼힐 전망대까지가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다. 고도가 높아 얼음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젠을 꼭 챙겨야 한다.




산속답게 저녁은 빠르게 찾아왔다.

일기를 정리하고, 저녁을 먹고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급기야 게임을 다운로드 받았다. 

이렇게 새로운 일을 가득 하는 데에도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흐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한 시간을 아끼려 잠을 줄이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야채카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되었다


어느새 2019년 12월 31일, 히말라야 산장의 식당은 전세계 사람들로 가득 찼다.

2020년의 새해 히말라야를 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등산객들. 벌써 술병을 따는 사람도 보였다.

연말 분위기에 나 역시 술이 조금 땡겼지만, 내일 새벽 일찍 산행을 시작해야했으므로 참기로 했다.


도대체 어떤 경지에 올라야 산에서 술병을 깔 수 있는걸까. 정신이 흐려져서 발을 헏딛는게, 혹은 숙취로 산행 중 구토를 하는 게 무섭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긴, 등산은커녕 운동도 안하는 내가 히말라야를 밟는데 무엇이 불가능할까 하는 생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나는 술 없이는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추위를 무릎쓰고 밖으로 나갔다.

산을 배경으로 까만 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황홀해 찍히든 찍히지 않든 이 모습은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방으로 달려가 삼각대가 달린 셀카봉을 가지고 나왔다.

다행히 나는 고등학교 때 1년 정도 사진을 배웠고, 그 결과물은 이랬다:


휴대폰으로 찍은 것 치고는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덜덜 떨며 숙소로 들어온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심심하다고 밖으로 나가 본 내 자신을 칭찬했다. 안그랬으면 히말라야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하나 놓쳤을 것 아닌가!



우리는 저녁 8시반 쯤 고든 아저씨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화장실에는 샤워부스가 있었지만 우린 씻지 않았다.


씻지 않은지 만 2일째.

예상과 다르게 머리카락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발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상태가 안 좋은 곳이 있었는데.. 나는 속옷을 더 챙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속옷을 챙기거나, 팬티라이너를 챙기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컨디션이 좋더라도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호르몬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핫샤워에는 추가 요금이 붙고, 머리를 못 말리면 감기에 걸릴 수 있기에 샤워는 추천하지 않는다.




식당과 가까운 방이라 그런지 침낭 안에서도 와이파이가 미약하게나마 잡혔다.

고든 아저씨가 우리를 섬세하게 배려해준 덕분에 우리는 이불을 하나씩 더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침낭 안에 핫팩을 서너개 정도 던져 놓으니 어느 새 이불 안은 뜨끈뜨근했다.

새해를 맞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이곳은 아직 밤 9시였지만, 시차 때문에 한국은 이미 새해를 맞고 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새해 카운트다운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마음이 벅차올랐다. 나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메모장을 켰다.

2019년은 내게 어떤 해였더라. 그리고 2020년은 나에게 어떤 해가 되기를 기대하더라.

'매일이 오늘만 같길' 

나는 그렇게 적었다.



"뭐야 이거 강남스타일 아니야?"


혼자 새해 감성에 빠져들던 나는 동생의 말에 이어폰을 뺐다.

뭐야?하며 귀를 기울이니 "오빤 강남스타일!!"이 들려왔다.

온 숙소가 떠나가라 뿜빰뿜빰한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중간중간 사람들의 환호성이 섞였다.

네팔에서 듣는 강남스타일이라니.. '두유노우 갱남스타일'이 아주 헛얘기는 아니었나보다.


그 뒤로도 건물이 떠나갈듯한 클럽파티는 계속 되었다. 각종 EDM과 익숙한 팝 음악이 나오면서..

아마 술도 마시고 있겠지. 안주는 도대체 뭘까, 프링글스?

이것은 새해를 맞는 네팔식 연례 행사인가, 혹은 매주 벌어지는 등산객들의 파티인가.

고도 3000미터에서 펼쳐지는 알 수 없는 이 파티의 정체성을 의심하면서.

그렇게 2020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2019년 얘기가 끝났어요! 벌써 4월말이라니.. 다음주가 중간고사라니...ㅠㅠ 후딱 시험치고 돌아오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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