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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ㅇ May 06. 2020

[D+6] 히말라야 위에서 새해를 맞다

2020년 1월 1일 (1)

핫팩을 던져 놓은 침낭 안은 매우 따듯했지만 어쩐지 푹 잠들지는 못했다.

2020년의 첫 해를 보기 위해 우리는 새벽 5시 20분에 기상했다. 


고도 3200m에서 맞는 2020년의 새해!


푼힐 정상을 앞둔 내 새해 첫 고민은 '고산병 약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였는데. 행여나 정상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게 될까봐, 결국 약을 먹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것은 올해 첫 실수가 되고 말았다.

빈 속에 들어간 고산병 약은 최악의 경험을 선물했기에..



5시 45분. 밖은 온통 새까맸다.

벌써 산행길을 따라 움직이는 동그란 불빛들이 곳곳에 보였다. 

헤드랜턴이 없었던 우리는 핸드폰 불빛을 목에 걸었다. 동생이 맨 앞에서 서고, 내가 그 뒤에, 헤드랜턴을 가진 고든 아저씨가 맨 뒤에 선 채로. 우리는 일렬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어두운 시간에 산을 탄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기온도 낮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낮았고, 무엇보다 시야가 굉장히 좁아졌다. 중간중간 거칠게 부러진 나무들이 튀어나온 동물처럼 보여서 놀라기도 했다. 돌이 내려앉다 말아서 동굴처럼 보이는 구간도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는 스산한 공기가 옷속으로 들어왔다. 

왜 숲속이 동화 속에서 무서운 공간으로 묘사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연출 지망이었다면 여기서 엄청난 레퍼런스를 얻어갈 수 있었을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산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나 나는 10분도 못 가서 주저앉고 말았다. 구토가 날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빈속에 고산병 약을 먹었다는 말을 듣고, 고든 아저씨는 질색을 했다.



새벽 6시는 이렇게나 깜깜하다


정체 모를 건물의 입구에서 잠시 앉아 물을 마시고 심호흡을 하니 좀 나아진 것도 같았다.


다시 길을 떠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웰컴 푼힐'이라는 게이트를 보았다. '드디어 이 울렁거리는 등산길이 끝났구나!' 싶어 속으로 안도했지만...

고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게이트를 넘어선 이후에는 가히 설산 위의 등산길이라 부를만했다. 

고도 3000미터가 넘어가니 발을 딛는 곳마다 얼음이 널려 있었는데. 

우리는 아이젠이 없어 등산스틱을 발톱 삼아 올라가야 했다.


걷는 동안 고산병 약은 조심씩 위 안에서 분해되며 내 내장을 괴롭혔다. 

속이 안 좋으니 몸이 옥죄는 기분이 들어 후리스를 하나 벗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도 안드는 그 엄청난 추위 속에서 옷을 벗는다는 건 위험한 짓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내 상태는 민폐가 되고 있었다. 구토감에 나는 10분에 1번씩 쉬어가야 했고. 빠른 속도로 걷는 다른 등산객들에게 몇 번이나 길을 내주었다.


새 해가 뜨기 전, 등산길 위에서 본 풍경


얼음이 깔린 등산길이 끝나자 쇠난간이 달린 계단이 나왔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높은 계단에는 얼음이 얼어, 모두가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40분?

해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미 저어 산 너머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고든 아저씨의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지체되는 듯했다. 그래도 우린 해가 다 뜨기 전에 정상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봉을 비롯한 히말라야 산맥이 360도로 펼쳐졌다.

하지만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모든 감흥을 어제 다 써버린 듯했다. 고레파니에 올라갔을 때에는 대자연 앞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설산들이 조금 더 가깝게만 보일 뿐이었다.



신년이라 많은 사람들이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탄콩이를 보았다!

어제 우리와 함께 등산하던 그 검은 강아지를.


'저 비쩍 마른 몸에 춥지도 않나. 어떻게 그 가파른 길을 올라왔을까, 지금까지 푼힐을 몇 번이나 올라온걸까'라고 생각하던 차에 한 서양인이 탄콩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조련을 한건지, 가만히 앉으라는 말에 탄콩이가 얌전히 앉았다. 은근한 배신감을 느끼며.. 우리는 음료를 파는 갑판대로 갔다.




살을 에는 추위에 따듯한 음료 없이는 버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진저허니를 하나 시켜 둘이 나눠마시고, 고생한 고든 아저씨에게도 음료를 하나 대접했다.


처음에 푼힐 트레킹을 시작 할 때, 나는 어떻게든 돈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지인과 흥정하면 불과 몇 천원에 일 박을 할 수 있다', '3박 4일간 총 얼마로도 푼힐을 등산할 수 있다' 이런 글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기에. 그도 그럴 것이 블로그를 들어가면 거의 모든 이들이 일정 얘기를 하거나, 가격 얘기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벌써 조금 생각이 바뀐 듯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좋은 걸 대접하고 싶고, 감사 표시로 뭐라도 드리고 싶어졌다. 내가 엊그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초콜릿을 챙겨 받았듯이.

한국에 살던 나는 정을 최하위 가치로 두는 편이었는데, 오히려 산 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니 사람 간의 끈끈한 어떤 것이 더 와닿았다. 그런 점에서, '그 어려운 시절에도 콩 한쪽도 나눠먹고 참 정이 많았는데'라는 말은 틀린 것 같다.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모두가 고생하는 걸 이해할 때 비로소 정을 나눌 수 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산 위에서는 경쟁이 필요 없으니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챙겨주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 뿐이었다.


 


아무쪼록 우리는 따듯한 음료를 마시며 새해의 히말라야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 등산객이 고든 아저씨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는 작년에 아들과 함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등산했는데, 그 때 함께 간 포터가 고든 아저씨였다고 말했다. 1년이 지나, 푼힐 전망대에서 우연히 고든 아저씨를 만난 것이다. 그때와 같이 산 위에서.

그는 우리에게 '고든 아저씨 정말 좋아 잘 챙겨주고..'라며 그의 칭찬을 한참 늘어놓았다.

산 위의 인연은 이렇게 신기한 면이 있다. 그리고 세상은 이렇게나 좁다.

문득 산을 내려간 후에도 고든 아저씨를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동생은 꼭 해야하는 게 있다며 배낭 속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토블레로네 초콜릿이었다.

동생은 초콜릿을 들고, 포장지에 그려진 그림에 맞춰 안나푸르나 봉 사진을 찍었다. 이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동생은 포카라에서 미리 토블레론을 사서 챙겨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포장지의 모양과 안나푸르나 봉의 모양이 달랐다. 초콜릿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MADE IN SWITZERLAND'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건 안나푸르나봉이 아니라 마테호른을 모티브로 한 초콜릿이 분명했다.

고도 3000미터까지 고이 초콜릿을 모셔 왔는데, 잘못된 산으로 모셔온 셈이었다!



정신 없이 웃는 사이에 해는 거의 다 올라왔다. 구름이 많은 날씨라 맑은 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름 사이를 가르는 불빛이 그 나름대로 멋있었다. 해보다는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등산객들 덕분에 괜히 새해 분위기가 더 나는 듯했다.

새해 소원은 아주 구체적으로 빌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2020년 5월의 시점에서 이미 실패한 소원이 되었다.)


게다가 뼛속 깊이 느껴지는 추위 탓에 인생샷을 남기리라는 나의 포부는 망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사진을 찍어가는 포토스팟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모두가 빙 둘러 눈치싸움을 시작했고. 한 명씩 들어가서 찍고 빠지는 식으로 빠르게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20분 쯤 지났을까. 동생이 너무 추워하길래 하산을 결심했다.

사실은 패딩 없이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미친 행동이었다*


*우리를 빼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리털이 빵빵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패딩조끼, 후리스, 바람막이를 껴 입었고, 핫팩을 주머니에 넣고 올라왔다.


그리고 아이젠 없이 이 길을 하산하는 건 더 미친 짓이었다.

해가 뜨니 시야는 훨씬 넓어졌지만, 밟는 곳마다 얼음밭, 눈밭이었다.


"우리 엉덩이로 내려갈래?"


동생이 말했다. 나는 엉덩이에 동상 걸리고 싶냐고 대답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양손에 등산스틱이 없었다면 정말 엉덩이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몇 백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조심조심 내려갔는데.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산하다가 미끄러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마의 구간이 하나 있었다. 한 중국인과 서양인 하나가 심각하게 미끄러졌고, 등산스틱 하나가 부러졌다.




하지만 우리의 고든 아저씨는 유능한 가이드였다. (18년 간 ABC를 183번 올라간 경력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그는 등산길보다 약간 바깥쪽으로 난 비탈길을 권했는데. 언뜻 보기에는 비좁은 그 길이 더 위험해 보였지만. 쭉 뻗은 비탈길보다는 흙이 많고 구불구불해 넘어질 위험이 적었다.


겁이 많은 동생은 고든의 손을 잡고 내려갔고, 나는 스틱을 눈밭에 퍽퍽 찍으며 조심히 내려갔다.

경사진 눈밭의 나무숲이 왼편에 보였다. 한순간 미끄러지면 끝이 보이지도 않는 산중턱으로 그냥 구를게 뻔했다.


고든 아저씨는 여기에 헬리콥터를 부르려면 3000달러를 내야 한다고 했다. 360만원짜리 걸음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극도로 또렷해진데다가. 생각보다 산이 체질에 맞았던 나는 별탈 없이 하산할 수 있었다. 



아까 그 게이트. 불과 2시간만에 이렇게 환해졌다.


하산길에 우리는 아까 만난 한국인 등산객을 한 번 더 보았다. 우리의 원대한 세계일주 계획을 들려주자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복을 빌어주는 새해 인사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긴 하산길 끝에 우리는 어제 묵었던 숙소로 되돌아왔다. 시간은 겨우 오전 8시였다.

얼음길 위에서 바짝 긴장한 탓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 몰라, 오늘 할당량 끝났어!!!!"


동생이 파업을 선언했다. 고든 아저씨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일정상 오늘은 타다파니까지 하산해야만 했다. 하지만 타다파니는 특히 얼음이 많은 구간이었고. 흐린 날씨를 보니 더 내려가는 게 엄두가 안 났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얼음을 겪고나니 가고싶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우리는 멀뚱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결국 우리는 고레파니에서 히말라야의 풍경을 마음껏, 여유롭게 눈에 담고 내일 마저 하산하기로 했다. 타다파니 구간은 포기하고**.

그렇게 오늘의 하루 일정은 오전 8시에 끝이 났다. 


**등산코스는 포카라~울레리~반단티~고레파니~푼힐. 하산 예정코스는 푼힐~고레파니~타다파니~간드룩~포카라. 당연히 등산코스와 하산코스를 바꿔도 괜찮다. 하지만 고레파니~타다파니~포카라는 하루만에 갈 수 없는 구간이다. 즉, 우리는 하루를 고레파니에서 더 보내는 대신, 올라왔던 길로 똑같이 다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날짜 칸에 2020이라고 적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네요. 1월 1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라니... 중간고사 기간도 휘리릭 지나가고, 요즘은 시놉시스를 쓰는 중이에요. 어쩌다보니 역사판타지, SF판타지, 포스트아포칼립스물 이렇게 판타지 종류만 맡게 되었는데, 재미있어요! 셋중 하나를 휘리릭 마무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따듯한 봄 행복하게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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