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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ㅇ Mar 11. 2020

[D+0] 세계일주가 별 일이야?

2019년 5월 10일 ~ 12월 26일

가끔 인생에는 인과관계를 정확히 따질 수 없는 순간이 생겨난다.

2019년 5월부터 내게 좋은 일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세계일주 결심도 그 중 하나였다. 조금 더 정확히 기억을 떠올리자면 세계일주가 그 시작점에 있었다. 내가 큰 세상으로 눈을 돌리니 더 많은 게 보이는 건지, 혹은 그동안 쌓아왔던 역량이 한 번에 빛을 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창 바빴던 시기임은 분명했고 떠나는 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종강은 12월 20일이고 출국일은 12월 26일이니, 일주일은 쉴 수 있다는 내 계산은 보기 좋게 틀렸다.


지인과의 마지막 티타임. 나는 향수와 커피를 선물했고, 행운의 2달러와 용돈을 선물 받았다.

나는 주변에 작별인사를 전하느라, 또는 여행용품을 구하느라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오면 커피와 함께 단막극을 고치는데 전념했다. '멋지게 공모전에 작품을 내고 떠나는거야..!'라는 욕심 탓이었지만, 사실 그 과정은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출국일 이브, 그리고 가족 외식이라고 안양천이 한눈에 보이는 뷔페에 간 날. 나는 전날 밤을 새서 씻지도,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퉁명스럽게 밥만 먹고 돌아와서 부모님께는 죄송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출발일. 12월 26일. 나는 점심을 먹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전달하지 못한 편지들을 부치러.

편지를 쓴 건 내가 여행 중에 행여나 죽을까봐서였다. '오버하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나는 각오가 돼 있는 셈이었다. 매일 수많은 곳을 다니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답신과 선물들. 고3들만 먹는다는 공진단도 있다.


사실은 너무 비장해서 웃긴가, 정말 이걸 전해도 괜찮은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도 내가 너무 진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하게 답신을 보내준 친구도 있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든, 카카오톡 답장이든, 손편지든, 혹은 선물이든. 나의 글은 어떤 형식으로든 또 다른 마음을 낳았다. 세계일주 떠나기도 전에 벌써 한 가지를 이룬 셈이다.


죽음에 관한 수많은 교훈들이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을 때, 오늘 당장 주변에 마음을 전하세요'라고. 하지만 세계일주라는 핑계가 없었더라도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확실한 건, 죽음에 대한 자각이 때로는 강한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체국에 다녀오자 시간은 벌써 3시에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짐을 풀어헤치고 배낭을 쌌다. 당연히 기념 사진도 찍었다. 내 앞배낭과 뒷배낭을 더한 무게는 13kg이었다. 당시 필요 없는 물건들을 왜 그리 챙겼는지. 배낭의 무게는 인생의 업보 무게라던 여행자들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준비과정 얘기를 생략하다보니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 이 세계일주는 대학생 여동생과 함께 시작했다. 후에 동생은 먼저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말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도 딸을 혼자 보내기에는 걱정이 많았던 데다가, 이참에 겁 많은 둘째에게 겁 없는 맏딸을 붙여 세상 구경을 시키자는 심사였다. 그리고 혼자 장기여행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도 동생의 존재는 의지가 되었다.


후에 동생은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동생에게도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라 붐빌거라던 예상과 달리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수속을 밟고 글로벌유심*을 수령하자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할 게 없어졌다.


*데이터를 충전하면 국가에 상관없이 3G를 사용할 수 있는 어플이 있다.


여동생은 떠나는 날 울게 될 것 같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고픈 우리 앞에는 한식+일식집이 있었다. 아빠는 평소와 같이 누구나 볼 수 있는 메뉴를 대단한 지식을 발견한 것 마냥 설명하고 있었고, 늦둥이 남동생은 그런 아빠를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으며, 엄마는 오늘은 국물이 땡긴다며 메뉴판만 짚어보고 있었다. 모두가 완벽히 자기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우리 가족이 정식을 다섯 개 시켜 잔반 없이 모두 먹어치웠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소식가인 우리 가족은 인원수대로 시키면 절반은 남는 게 보통이었다. 먼 길 떠나려는 걸 몸이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내 몸에는 핑계가 있었지만, 부모님과 남동생은 왜 그렇게 많이 먹은건지 알 길이 없었다.



출국장에 들어갈 때도 엄마만 눈시울을 조금 붉힐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낭 여행자에게 면세점은 사치였으므로, 여동생과 나는 일찍 보딩장 근처에 가 있기로 했다. 저녁 10시쯤, 우리가 보딩장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밀크티와 케잌을 시켜먹는 것이었다.


'외국 나가면 은근 생각나는 게, 한국 디저트래.'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공항 카페에 앉아, 우리는 친척들에게 이제 출국한다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약을 한가득 싸 주신 작은아버지께는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드렸다. 연신 전화를 돌리며 '이게 가족행사라도 되는 건가' 하는 볼멘소리를 속으로 작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한 번이라도 친척들에게 직접 전화한 적이 있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계일주가 별일이긴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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