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은 지연과 할머니의 대화를 매개로, 백 년의 시간이 이 세계에서 다시 기억된다.
삼천이와 새비, 영옥과 미선이, 희자와 명숙 할머니.
그들의 생애는 할머니를 통해 다시 삶의 구획 속에 들어서게 된다. 죽은 자들이 산 자에게 기억되고 읽혀서 다시 한번 사는 것이다. 그들이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마음을 보며,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리어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나와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쏟아내며 산 날들보다 억누른 채 살았던 날들이 더 많았다는 것.
삶은 불행을 담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행복을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적당한 접시 같았다. 언제나 흘러넘치는 것은 불행인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적당히 놓인 행복을 잘 안고 살아간다. 가끔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내며.
82p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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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어지는 시점에도 내 이름은 기억되고 누군가의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내 삶의 한 조각이라도 누군가에 의해 읽힐 수 있을까. 우리는 사라져 가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게 사람이든, 기억이든. 사라지는 것은 극도로 무서운 일이다.
신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우리에게 선명한 기억을 선물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라져도 온전한 사라짐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299-300p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 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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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으로부터 이어져 온 직선 같은 마음이 내게도 있으려나. 별 것 아닌 듯한 마음일지 모르지만, 처음 보는 이에게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 이 마음. 어쩌면 별 것 아닌 듯한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337p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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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내가 겪어온 모든 나날들을 회상한다. 오래전 없어진 ‘나’가 아닌,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나’에게.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그렇게 내가 나에게 위로받고자 기다리고 있다.
나 역시도 수많은 ‘내’가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용서받길 원했던 나, 위로받길 원했던 나.
생애를 기록해 놓은 계단이 있다면, 그들은 층층이 서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을 두고 가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