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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주 Nov 10. 2023

사정이 그렇다면

날이 추워지니 아침에 일어나기 쉽지 않지요. 잔뜩 늑장을 부리다가 마지막 알람이 울리고야 몸을 일으킨답니다. 저는 회사가 꽤 먼 뚜벅이라 아침 일찍 역으로 향하는데요. 한여름의 출근 날과 비교하자면 확연히 사방이 어둡습니다. 역 근처에 다다르면 그래도 해가 모습을 드러내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언제든지 해를 볼 수 있음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교환학기 극야를 경험하고 아무래도 그리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가 되도 않은 어리광을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뭐 어쩌겠습니까.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어그라들면 합리성 또한 사라지기 마련이죠. 오늘도 해를 못 보았다는 내용으로 노트가 채워지던 어느 하루 끝날 기미 없는 밤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기숙사 근처에는 작고 큰 호수들이 많았습니다. 장대한 나무들 사이에 소곤소곤 숨어져 있었지요. 어쩌면 저는 나무와 호수뿐인 세상에 잠시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된 식료품점을 가기 위해서 도대체가 얼마를 걸었어야 했던가요. 실로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겨울의 한 자락에서 길을 걸으면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을 때가 대다수였답니다. 인간은 하나도 없고 오직 거칠고 아름다운 자연만이 있었습니다. 그 완전한 앞에서 저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고독을 곱씹고는 하였습니다.


고독은 또 다른 고독을 낳습니다. 한도 이상으로 몸집을 불린 고독이 하루를 집어삼킨 그날 밤 저는 기숙사 뒤편 숲으로 향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기에 넘어지면 넘어지는 대로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걷기만 했었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문득 사방이 밝아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저 가운데 호수였습니다. 호수가 빛나고 있던 거여요. 넘쳐흐르는 별을 가득 담은 채로 말이지요. 반사적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는데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토록 쏟아질 것만 같은 별빛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로 하여금 세상의 경이로움과 진정 혼자됨을 새로이 일깨워주었는데요. 마냥 좋지도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닌 오묘하고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혼잣말을 이어가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불현듯 빛이 넘실거리는 호수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 것입니다. 저토록 찬란한 것을 목구멍에 쏟아내어 저의 몸에 잡아두고자 하는 충동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어쩐지 저도 완전함에 이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홀린 듯 손을 가져갔다가 세상에 어찌나 차갑던지 머리 꼭대기까지 아려오지 뭐예요. 별세상은 간데없고 섬뜩하게 끼쳐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컴컴한 숲길을 한달음에 내달렸습니다.


불빛이 하나 둘 보이자 약간의 안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어둠이 짙어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잔상의 껍데기를 헤집으며 마침내 저는 스스로 불완전함을 인정하였습니다. 만사가 차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부족을 받아들이자 의문이 사라지고 저의 앞에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길만이 놓이게 된 것입니다.


존재가 스물스물해질 때면 그때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소리를 떠올립니다. 삶이 다시금 활기를 띕니다. 마치 다음엔 뭐든지 할 수 있는 양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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