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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주 Dec 05. 2023

갉아먹는 불꽃들

독감에 걸려서 골골골 유행하는 건 일단 죄다 깔짝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가고 올해도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잠기어 고요하고 싶은데 이리저리 돌고 돌아 어지럽기 그저 없군요. 제멋대로 오르고 내리는 열 때문에 한동안 재택을 하였습니다. 솔직해지자면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흐름을 놓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되는 대로 하루하루의 일을 쳐내고 마침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이 왔습니다.


오랜만의 지옥철은 아니나 다를까 재택으로 다져놓은 여유 어쩌면 무료를 산산조각내고 홀로 지치고 지친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기운은 더욱 없어지고 목적지 역에 이르기까지 저는 왜 무엇이든 시원하게 그만둘 수 없는지 한껏 서러워하였습니다. 벌려놓은 일이 뭐 이리 많은지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터벅터벅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오전 내내 미팅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차례 미팅을 마치고 다음 미팅을 곧이어 진행하는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주변의 명도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착각이 들더라고요. 애써 무시하고 어찌어찌 마무리하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이건 뭐 제가 밥을 먹는 건지 밥이 저를 먹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음식을 삼키기가 불편해서 빠르게 식사를 끝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허한 기분이 드는 줄만 알았는데 세상에 제가 오후 반차를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정신머리가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싶으면서도 집에 얼른 돌아갈 생각을 하자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역은 무슨 역이고 내리실 문은 무슨 쪽이고 흘러나오는 지하철 안내 방송을 들으며 머리가 점점 뿌옇게 흐려왔습니다. 이상함을 넘어선 이상함의 절정은 짧은 실신이었습니다. 하차하기 위해 승강장 쪽으로 발을 향하면서 쓰러졌던 것 같습니다. 눈을 떠보니 저는 지하철 의자에 눕혀져 있었는데요. 그런 제 자신이 너무나 창피해서 다시 쓰러지고 싶었다면 과언입니다.


얼렁뚱땅 응급센터로 가서 여러 검사를 받았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었고 진료비는 잔뜩 나왔습니다. 한숨과 함께 결제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왜 이리 아찔하던지요. 커다란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분명 있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겄는데 피곤한 일이 끝 모르고 생기는 것만 같아서 짜증이 치밀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쏘아붙이다가 문득 이게 다 무슨 가지가지한 꼬락서닌가 싶더라요.


적당히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생이 너무나 허무하여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절망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하루가 24시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살아가니 변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테지요. 다만 일단은 무한한 잠이나 진창 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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