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아지면 머리가 무거워진다. 그럴 땐 무조건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행위는 '걷기'이다. 걸으면 맑아진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걷기'를 찬양한다. 얼마 전 눔Noom의 창업자인 정세주 님께서도 걸으면서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말을 들었다. '파리에서 도시락 파는 여자'라는 책으로 유명하신 켈리 최라는 분도 빚더미에 앉아 생이 막막할 때 매일 걸으면서 시련을 극복했다고 한다. 나 또한 '걷기' 신봉자이다. 나도 일이 생기면 최소 2시간 이상 걷는다. 어제 아침에 책을 읽다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 오랜만에 북한산을 가보고 싶었다. 아침 8시부터 걷기 시작했다. 여의도를 지나 서강대교를 건넜다. 서강대교를 지나는 차들은 사연(?) 있어 보이는 나를 처다 본다. 한강을 지긋이 쳐다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려다 아침부터 놀랄까 봐 자제했다. 서강대교를 지나니 광흥창역이 나왔고, 광흥창역을 지나 연세대를 가로질러 안산 자락길로 향했다. 안산 자락길은 내가 워낙 좋아하는 곳이다. 거기 앉아 차를 한 잔 했다.
집에서 우린 자스민 차이다. 얼마 전 지인께 선물 받은 차인데 밖에 나와서 먹으니 풍미가 더 진하다. 안산 자락길을 지나 북한산 초입인 구기탐방소에 다다랐다. 관악산, 인왕산, 안산, 북한산을 자주 가는 데 그중 가장 터프한 곳이 북한산이라 생각한다. 경사가 제법 높고 올라가는 길에 집채만 한 바위가 많다. 홀로 하는 등산의 묘미는 참 많은 데 그중에 가장 큰 묘미는 '고독하다'는 것이다. 고독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면 자유롭다. 중간중간 만나는 절경은 덤이다.
어제는 미세먼지가 많아 서울 하늘 전체가 뿌연 먼지로 뒤덮여 보이지 않았는데 산에 오니 그나마 좀 낫다. 아무 생각 없이 만나는 자연의 절경은 나에게 "괜찮아,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발을 들여다 놓으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자연의 일부분이 된 것을 느끼는데, 그럴 땐 나라는 존재가 하염없이 작아진다. 존재가 작아지면 어김없이 평화가 찾아온다.
백운대 정상을 가려고 했으나 이미 수 시간을 걸은 상태라 대성문 분기점에서 평창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평창동의 어마어마한 주택들을 지나 시청 쪽에 일이 있어 시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8시간 정도를 걸었다.
걸음 수는 4만 보가 넘었고 거리로는 30Km를 넘게 걸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걷고 나니 요 며칠 머리로 향하던 무거운 기운이 싹 사라졌다. 가벼워지고 맑아졌다. 여태 나를 괴롭히던 생각, 감정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첫 1-2시간 정도는 여러 생각들이 앞 다퉈 목소리를 키운다. 그렇게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약 3시간 정도 걸으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5시간이 넘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엔 나를 보고 있는 고요한 침묵만이 있다.
고요한 침묵 안에서 나를 조용히 관찰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침묵이 한 시간 두 시간 지속되다 보면 마음이 극도로 편해진다. "그냥.... 모든 게 괜찮아..."라는 작은 목소리가 올라오기도 하는데, 나중엔 그 목소리도 사라진다. 그냥 걷는 행위와 그것을 바라보는 침묵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걸으면 알게 된다. 나의 존재는 생각도 감정도 아니며, 지금 나를 괴롭히는 그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 만개의 생각 감정은 단지 잠깐 일어나는 먼지와 같다는 걸,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앎을 얻는다. 걷는 행위는 생각보다 위대하다. 걷다 보면 모르게 되고, 또 알게 된다.
3월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