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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Jun 08. 2023

손목을 긋던 날.

앞날은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버텨봅시다




  다소 자극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약자 임신부 청소년께서는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아이는 어린이 집에 갔다.  오전 9시 반.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몇 주 전부터 나는 하이볼에 심취해 있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안주로는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했지만 냉장고를 뒤져봤자 나올 건 별로 없어 보였다.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을 사 와서 안주와 밥을 겸 해서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 술은 한잔이 되고 두 잔이 되고 세잔이 되고, 여섯 잔이 되었다.  많이 취했단 걸 느꼈다.




   그해는, 나의 여동생이 암으로 죽은 지 2년째가 되는 해였다. 나는.. 동생과 좋게 이별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아이를 낳은 직후 받은 가정폭력의 상처를 엄마와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충격으로 공황장애를 얻었고, 우울증이 심해져서 병원에서 약을 한 움큼씩 먹어야 했는데 동생도 엄마도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 탓을 했다.  동생과 나는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했고 엄마와는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동생이 간성혼수로 누워서 임종날이 되어서야 얼굴을 보았다. 동생은 내가 다녀간 후 4시간 후에 숨을 거뒀다. 나는 자책감이 들었다. 죽어가는 애 앞에서 나의 상처 내세웠어야 했을까? 나의 모든 것들을 접어두고 그 아이 에게만 집중해야 했을까? 그런 죄책감을 가지고 2년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우울증과 공황장애도 점점 심해졌다. 연락을 안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들을 키우면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로 지내다 그날은  모든 것들이 정점에 달하는 날이었다.


  우울했고, 죄책감에 시달렸고, 동생이 보고 싶었고, 이런 나 자신을 혐오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주방 싱크대 코너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커터칼로 손목을 그었다. 아팠다.  술에 취해서 초점을 잃을 만큼 취했는데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몇 번을 반복 그었다. 피가 팔뚝을 타고 내려왔다. 그제야 나는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남편의 욕설과 고함 후에도 , 공황발작이 왔을 때에도 나는 울었지만 소리 내서 울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리고는 나는 남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살려달라고.. 울면서 이야기를 했다. 동생은 119에 전화를 해서 아파트 비번을 가르쳐 주었는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응급요원들이 들어왔다. 응급요원은 내 팔을 보고는 처치를 하기 시작했고, 여자 응급요원은 내게 무얼 마셨냐고 물었다. 나는 하이볼을 마셨다고 했고, 맛있는 거 드셨네요 라는 대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곧 동생이 왔고 남편이 왔다.


   그 이후로는 그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아이를 데리고 왔을 테지만 119 대원의 이상한 질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적당히 둘러댔을 수도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내가 이런 일을 벌였으니 당분간 아이를 최대한 늦게 데리러 가도 괜찮겠냐고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원장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했고,  아이는 연장반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원장선생님께서는 아파트 문 앞에 죽을 놓고 가셨다. 그리고는 문자가 왔다. 얼굴을 보면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 죽 끓여서 왔다고, 문 앞에 놓고 가니 챙겨드시라고.


  원장선생님은  어린이 집을 옮기려고 상담 때 한번 뵌 적이 다였던 분이셨다. 나는 그저 아이들의 학부형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 내게, 죽을 주고 문자를 주셨다. 나는.. 그 죽을 받고 또 한 번 엉엉 울었다. 울면서 죽을 먹었다. 내가 한 짓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있는지 떠올라서. 그리고 아직도 나는 많이 , 너무나도 많이 아파서 엉엉 울면서 죽을 먹었다.


 그 이후로도 원장님은 가끔 연락을 해오셨고, 어린이집 담당 선생님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당시 교회 부목사님의 와이프도 일부러 과자를 갖다 주시곤 하셨다. 이전까지 전혀 나와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내 마음을 돌보려 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식들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교회에 다니면 다 저렇게 되나? 종교를 가지면 다 저렇게 착해지나? 저 사람들은 천사인가?


   


  몇 주 후, 나는 원장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교회를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그렇게 처음으로 교회란 곳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예배 내내 울기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일은 2022년,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단 일년만에 나는 종교가 생겼고 약이 줄어들었고 책을 읽고 여행을 했고 이사를 했으며 글을 쓰고 싶을 만큼 많은 변화와 호전을 보였다.  1년후가 이런줄 알았다면 , 단 1년만에 이렇게 달라질줄 알았다면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이런식으로 밖에 도움을 청할수 밖에 없었던것 같다.  그냥 힘들다 말하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서 내가 이만큼 힘들고 괴롭다라고 알리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표현에 익숙하지 못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익숙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누군가, 이글을 읽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거나

  혹은 힘든 결정을 하고 싶어 한다면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오늘만 지나면 괜찮아 진다고.

  나도 지나갔으니 당신도 지나갈꺼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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