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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Jun 03. 2021

아버지

만 30년이 지나도

매 년 6월 초엔 앓았다.

만 30년을...

엄마가 가신 지 3년 차로 접어들 올 해는

찬란한 5월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아니었다.

한 밤중에 깨어 버린 난  가슴이 시려서, 아려서...

일부러 말씀을 틀어 놓았지만, 내 가슴 밑바닥 어디에선가부터 올라온 눈물은 결국 누운 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운 게다.

아빠의 넓은 품이...


만으론 56 , 올 가을이면 만으로도 57이 되는 중년이지만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해부터 나와 남동생은 고아가 돼 버렸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갈 나이여도 내게는 부모님의 빈자리가 휑하니 비어 버린 것이다.


유난히 아빠와의 많은 시간을 어려서부터 공유했던 나로서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만 26. 큰아이 임신 5개월 차) , 엄마를 걱정해야 했고,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었다.

가시기 전의 아빠는 슬슬 아들에 대해, 나중에 만날 며느리에 대해 기대감과 친근함을 표현하시던 때였기에 말이다.



당시 난 방위산업체로 근무할 신랑을 따라 광양으로의 신혼생활을 시작 한 지 일 년 하고 두 개 월차였고 임신 5개월에 막 들어서던 임산부였고,  한 집안의 장남 며느리였다.

서울에 오면 시댁이 먼저였던 (시조부모님까지 계셨기에) ,


1991년 6월 3일,

당시 난 6/1일에 ( 당시만 존재한 방위산업 특례병들의 6주 현역 군인생활) 임산부의 몸임에도 시어머님을 따라 대구로 제대하는 남편을 마중하러...

피곤했던 탓에 다음날 친정으로 이동을 못한 채 , 아빠와 전화 통화로 '6일에 봬요!' 하던 아스라한 기억.

아빠는 전화선 너머로 임산부인 딸을 걱정하셨었고 훈련을 마치고 온 하나뿐인 사위의 음성이 씩씩해졌다고 웃으시던 그 음성이 이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아빠의 모습도 아닌 음성이 돼버렸다.


어려서부터 아빠를 따라 외국 손님들을 많이도 만나고 다녔던 내 유년 시절 , 우리 시절의 친구들과는 조금은 다른 경험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시골의 삼남 일녀 중 막내 셨었고, 대학시절부터 서울 생활을 , 대학 땐 정구 선수도 하셨었다는 소릴 나중에 들었던 기억도. 그래서 운동도 좋아하셨다.

또 청년 시절 미국 생활 중엔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귀국 전엔 미국의 20여 개가 넘는 주를 혼자 여행하셨었다는 이야기는 , 내 미국 시절 막내 이모부가 해주셨었다.


그래서인가, 항상 우리 남매에게 , 긴장하며 살아라, 세 개국의 언어는 공부해라 라고 말씀하셨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우리 아빠는 자상한 사위셨었고 자상한 아들이셨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아빠의 몇 가지 모습은 항상 내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명절 때면 귀한 달력과 위스키 한 두 병을 직접 포장하셔서 친가와 외가에 선물을 하셨었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님은 당신의 아들 집이 아닌 우리 집 ( 둘째 사위네 )을 이른 아침 6시에 샤브레 과자 한 통을 들고 누르시곤 했었다.


살다 보니, 장인이 딸 집에 오시는 일은 사위가 어렵지 않은 탓이었다. 항상 외할아버지와 아빠가 바둑을 두시며 티걱태걱 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그래서 내가 결혼하면 당연히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리라고 짐작했었지만, 그럴 사이도 없이 아빠가 가버리셨다 ( 아마 계셨어도  그런 모습을 보긴 어려웠을듯하다. 시댁의 가풍은 남자의 성이었고 , 내 집의 가풍은 Lady First!

달랐다 너무도 많이.

아빠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셨었단다.

거기에 청년시절부터 집을 떠나 살아서 가족에 대한 꿈이 많으셨었나보다.


내가 시조부모님까지 계신 집으로 시집을 간다 했을 때, 아빠는 어른들이 많은 집이라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단둘인 남동생, 막내며느리셨던 엄마  덕에 형제 많은 집으로 시집가야지 하던 꿈 아닌 꿈이 있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 사실 , 이 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란 말인가... 아빠와 딸의 착오랄까....)


이른 새벽 흐르는 눈물을 닦고 ,

어린 시절, 아빠의 시선으로 남겨주셨던 옛 사진 들을 꺼내본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부모님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유별을 떠는 것도 아니다 실인즉, 그리운 거다.

이제는 음성조차 희미하고 희미한 내 아빠가..

아빠가 가신 지만 30년의 6월 3일이 밝았다.

오늘만큼은 오십의중년을 넘은 아줌마가 아닌 사랑을 듬뿍 받던 어느 집의 하나뿐인 새침데기  딸인 나로 존재하련다.


내 하나뿐인 누드 사진도

아빠는 항상 귀가하시며 , "은미야!"를 외치셨던 시절이 있었다.

망원동 75-23번지 시절

합창단 시절 ,매 주 토요일마다 보문동까지 데려다주고 데릴러오시고...

1972년 첫 칼라필름 시절 , 덕수궁에서 아빠의 시선

코쟁이 아저씨들이 선물로 준 원피스를 입고 현충사에서, 철없던 소녀시절

남이섬에서.

북안 스카이웨이에서..

그리고 내 대학원 졸업시절 ( 항상 날 응원하셨었던 아빠셨지만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을 때는 반대를 하시기도,,, 혼인 늦어지나 싶으셔서... ) 근데 대학원 졸업 후 난 용기가 부족해 독일로의 유학을 고민하다 포기했었던 시절...

그렇게 유학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 나

어쩌면 어리석었었는지도?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한 두 가지야 없으랴...


결혼식날 날이 궂을까 봐 밤 새 시던 아빠가,

맏며느리로 시어른들 생신상을 차리는 딸이 걱정돼 노량 수산시장에서 커다란 회 한 접시를 준비해서 시댁 문 앞에 놓고 가시던 아빠의 뒷모습이  한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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