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진잼
시차적응 때문에 일찍 잠이 들어서 그런지 새벽 중간에 깨버렸다.
정석대로라면 학원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겠지만 정말 운 좋게도 3월 19일은 St. Joseph's Day라는 공휴일이었다. 그래서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됐다.
그나저나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너무 춥다. 걸치고 있을 만한 후드 집업 하나 안 챙겨 온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비비적거리면서 체온을 올리고 있다가 근처 교회 종소리가 들릴 때 발코니 문을 열었다. 다른 건물들로 막혀 있어서 전망이 좋지 못했지만 고개를 바짝 들어 맑고 푸르른 하늘을 즐겼다.
목욕용품을 챙겨 협소한 샤워부스에 들어갔다. 전날에 구매한 샴푸와 바디워시를 개시했는데 수질이 달라서 그런 건지 눈을 번뜩이게 만들 정도로 달달한 향이 진동했지만 거품이 신명 나게 나지 않았다. 잘못 산 거 같다. 왠지 달달한 향에 금방 질려서 2개월 동안 다 못 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섣부른 선택을 한 나에게 아주 잠깐 실망했다.
플랫 메이트 두 명이 차례차례 일어나 스콧츠(Scotts) 마트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여정의 시작은 '장보기'에서부터 시작하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메이트들과 마트에 갔다.
처음 떠나는 외출이었기에 라라와 힐리가 가는 대로 졸졸 쫓아갔다. 낯선 공간을 눈에 담으며 걸으니 엄청 멀게만 느껴졌다.
몰타에 있는 건물 색은 왜 하나같이 다 누리 끼끼 한 걸까? 그리고 건물들 키는 왜 다 고만고만한 걸까?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한글이 하나도 없으니 간판 하나 제대로 읽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플랫 메이트 두 명도 길이 익숙하지 않은지 약간 헤매는 듯해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갔던 스콧츠 마트는 숙소와 같은 슬리에마(Sliema)라는 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 숙소는 슬리에마 끄트머리에 있었고 스콧츠 마트는 슬리에마 중심부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한참을 걸어가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마트에 도착했다.
각자 카트 또는 바구니를 들고 흩어졌다.
나는 가장 손쉽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시리얼 코너를 우선적으로 공략했다. 오레오 오즈, 첵스, 콘푸로스트 등과 같은 설탕 폭탄 시리얼류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먹다가 단기간에 병을 얻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당 성분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시리얼 2종, 일반 우유, 아몬드 우유를 골라 담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지방 취의 비릿한 향이 났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대형마트 식품코너에 가도 유제품 코너는 한 줄 양쪽으로 진열하면 끝나데 여기는 마트 곳곳에 종류별로 치즈가 가득했다. 꼼꼼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유럽 각국에서 수입한 브랜드 치즈가 마트 한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조금만 걸음을 옮기니 정육코너나 반찬가게처럼 여러 종류의 치즈와 절임 채소를 원하는 양만큼 담아갈 수 있도록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치즈와 친하지 않아서 구매 시도는 못하고 열심히 눈으로만 담았다.
그렇게 치즈를 실컷 구경하고 난 후 냉장 코너 쪽에 가서 볶음밥용 잘게 썰린 냉동 채소도 담고 탄산수로 6개입 번들 하나를 샀다. 학원을 다니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초코 시리얼 바도 담고 이외 필요한 것들을 골라 담은 후 장보기를 끝냈다.
몰타에서도 에코 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 숙소에서부터 에코백을 챙겨갔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간 에코백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것과 에코백에 담아 갈 수 있는 걸로 분류해서 담기 바빴다.
다른 친구들보다 장보기를 빨리 끝낸 나는 마트 입구에 있는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큰 병에 담긴 탄산수를 잘못 산 거 같다. 갈길이 멀다는 걸 계산하지 못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친구들이 나의 탄산수를 보고는 당황한 듯 눈이 동그레 졌다.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얘는 이걸 어떻게 들고 가려고 여기서 샀지?'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아직까지 관절 팔팔하니 충분히 들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숙소로 걸어가는데 자꾸 친구들보다 뒤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전날 라라는 나에게 미리 조언을 해줬다. 물은 숙소 근처에 싸게 파는 곳이 있으니 거기서 사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말처럼 라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실수를 해버렸다. 결국 라라와 힐리가 번갈아가며 나의 물을 들어줬고, 불안하게 들고 있는 물품들은 자신들의 장바구니에 같이 담아줬다.
민망했다. 아무리 한국에서 '이성' 챙겨 오는 것을 깜빡했다고 해도,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정리하게 위해 주방에 가보니 치타가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치타와 인사를 했다. 같은 아시아인이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입이 터져서 조잘조잘거렸다.
이런저런 말을 이어가던 중 치타가 갑자기 아시안 마트를 가겠냐고 물어봤다. (이때 치타가 궁예인 줄 알았다. 어찌 내 마음을 읽은 건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발 좀 가자고 말했다.
힐리는 늦은 점심을 준비하면서 내 것도 함께 만들어줬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힐리와 라라한테 생줄리앙(St.Julian)에 있는 아시안 마트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두 번째로 숙소를 나섰다. 아까 마트 갈 때와는 반대쪽으로 해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서양인들에 대한 선입견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였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갑자기 힐리가 서로의 나이를 물어봤다. 나는 한국 나이로 30살이지만 국제적인 나이로는 생일이 안 지났기 때문에 28살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구분해서 말해주면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왜 한국의 나이 계산법은 다른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다.
알고 있는 영어단어를 쥐어짜서 '엄마 배 속에 있는 10달을 포함해서 태어나자마자 1살로 친다'는 것을 설명해 줬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대충은 알아들은 눈치다. 하지만 플랫 친구들이 워낙에 호기심 천국이어서 언제 또 질문 폭격을 날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치타의 지시에 따라 걷다 보니 클러버들의 성지인 생줄리앙에 도착했다. 그리고 생줄리앙 중심부에서 좀 더 걸어 들어가니 아시안 마트(Aroma Asian Supermarket)가 나왔다.
여기 아시안마트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계산대에는 파란 눈 외국인이 있었다. 데워 먹기만 하면 되는 즉석밥은 팔지 않았고 전기밥솥과 지퍼팩 같은 것에 쌀을 담아 판매하고 있었다. 냉동 코너에는 각국의 냉동만두들이 즐비해 있었고 각 나라별 라면이 각 구역별 진열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공간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매운 라면, 우동라면, 짜장라면을 바구니에 담고 쌀과 신선실 코너에서 적당한 용량의 김치, 적당한 사이즈의 양조간장, 양념갈비 소스를 담았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소주잔이었다.
소주잔을 산다는 것은 굉장히 쓸데없는 소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한국인이 머물고 갔다는 흔적에는 한글이 적힌 소주잔이 제격이었다. 그래서 소주잔도 하나 샀다.
마트 쇼핑이 끝난 다음에 생줄리앙에 있는 큰 쇼핑몰을 구경했다. 기념품 가게에도 들어가 보고 옷가게에 들어가서 라라가 입을 비치웨어도 구경했다. 카페에 가서 음료도 시켜 먹고... 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장소에 가서 장을 본다는 건 '시작'을 알리는 일이다. 그만큼 생활 전반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 일은 예산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기껏 해봤자 몰타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몇 번 장을 보고 나니 환전해 온 돈 중 한 달 예산을 한 번에 탕진할 뻔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또 걷기 시작했다. 한창 미세먼지가 가득 낀 한국의 하늘과는 달리 너무나도 맑고 파란 하늘이어서 어색함이 느껴졌다.
생줄리앙 중심지를 조금 벗어나니 Spinola Bay(스피놀라 만)가 나왔다. 거기에는 작은 모래사장이 있고 바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또다시 섬나라 몰타에 왔다는 걸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친구들의 이름은 제가 임의로 지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