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여 우리에게 조국이 있다
이렇게까지 자기소개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해외에 나가면 매일같이 면접을 보는 것처럼 한국에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등 열심히 설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한국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적어놔도 외국인들이 정확하게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급할 때는 초등학교 때 학원에서 지은 영어 이름을 말해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나도 그렇고 외국인들에게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국적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K-POP과 국내 몇몇 대기업 덕분에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훨씬 전이었으면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거나 북한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고, 나라만 한국일 뿐 중국어와 일본어가 공용어인 나라로 알고 있거나(아직도 그런 외국인이 있긴 하지만...) 심지어 매일같이 북한으로부터 전쟁 위협을 받는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외국인들이 먼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서둘러 말해주는 세상이 됐다. 예전처럼 많은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흥미로웠던 일화는 쿠코 언니네 숙소를 푸미와 놀러 갔을 때였다. 쿠코 언니네 숙소는 발레타와 근접한 동네로, 각자 1인 1방 1 화장실 체제로 살고 있었다. (어학원이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숙소를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
저녁에 쿠코 언니네 플랫 메이트와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친구들이 숙소에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의 플랫 메이트인 R만과 니타는 체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의례적으로 체코 맥주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체코인 둘이서 한국영화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니타와 R만은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좋지만 자신들은 홍상수 감독 영화가 그렇게 인상 깊었다는 말을 해줬다. 내가 영화에 조예가 깊었더라면 신명 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남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굳이 'Do you know...?'를 섞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에 대한 정보를 먼저 말해주는 것이 신기함을 경험했다.
위와 같은 경험과 달리 대체적으로 몰타에서 받는 질문이 있었다.
"Are you Korean? North? or South?"
일본, 중국인을 제외한 많은 외국인들이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면 South or North인지 물었다. 심지어 힐리는 내가 '동서남북' 영어단어를 잘 구분하는 이유가 South Korea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귀찮았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몰타를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 드물었던 것에 반해 일본 사람들에게는 하와이만큼이나 잘 알려진 여행지였다. 오래전부터 방학만 되면 단기 어학연수를 받으러 오는 일본 대학생들이 많았고, 청년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인이 와서 외국어 공부 겸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몰타에서 동아시아 사람 같아 보이면 대뜸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하면 다음으로 나오는 질문은 뻔하게도 중국인이냐는 물음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유일하게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봐주는 곳이 있다.
임디나(Mdina)와 라밧(Rabat) 사이에 유명한 과자점이 있는데 거기 사장님은 동아시아인을 보면 먼저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봐주신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이 있다.
"한국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 있음!"
한국 교양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과자점 사장님은 한국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다. (물론 한국인들한테만...) 그러면서 자신의 과자점 홍보를 잊지 않으셨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면 반갑게 맞아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하루는 라라의 제안으로 AMN과 안이라는 이름의 친구 한 명을 더 불러서 생줄리앙 클럽 성지인 파쳐빌을 가게 됐다.
처음부터 강렬한 사운드와 비트가 넘치는 클럽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우리는 생줄리앙에서 만나 파쳐빌 근처 펍에 가서 웜업을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도중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안이 급 질문을 했다.
"너는 한국인으로서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안 그래도 그날 저녁부터 비가 와서 우산 쓰고 다니기 번거롭고 힘들었는데 안이 그런 질문을 하자마자 뼈마디가 더욱 쑤셔왔다. 나는 잠깐 동안 안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각자의 국적만 따져봐도 나 한국, 라라는 스위스, AMN은 일본, 안은 독일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희한한 조합이라 생각했다. 역사적 배경만 놓고 봤을 때 일본은 굳이 말 안 해도 우리나라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있는 나라고 독일은 일본처럼 전범 국가이면서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의 아픔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라였다. 그 와중에 중립국인 스위스가 있으니 뭔가 평화로우면서 어색했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정치적인 질문부터 하는 안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해서 괜찮은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답변을 쥐어짜 낸 게 이 한마디이다.
"나는 모든 한국인을 대변할 수 없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북한의 태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내가 동문서답 같은 말을 하고 난 뒤 정색을 하자, 안도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는 정말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해야 했다. 그만큼 클래스 담당 선생님의 지식수준과 역량이 매우 중요했다. 앨리사 선생님한테 일주일 배우고 나서 몰타인인 루드윅 남자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루드윅 선생님은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해 매일 빼놓지 않고 국제 이슈를 챙겨보시는 분이었다.
한 번은 '모바일'을 주제로 토론을 하게 됐다. 루드윅 선생님은 삼성폰을 쓰는 사람과 애플폰을 쓰는 사람을 파악했다. 나는 그때 당시 삼성폰을 사용하고 있었고 헤이미는 애플폰 유저였다. 선생님의 질문은 이러했다. 왜 일본인들은 자국 브랜드 (ex. 소니 모바일...) 모바일을 사용하지 않는지, 한국인들도 왜 삼성폰을 더 많이 사용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따지는 것이 아닌 정말 순수한 의도로...)
솔직히 왜 그런지에 대한 정답은 없었다. 다들 각자의 취향대로 골라 사용하고 있었다. 쿠코 언니는 그냥 애플폰이 좋아서라는 답변을 했지만 나와 헤이미는 할 말이 있었다.
"한국사람이라고 삼성폰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한 번은 루드윅 선생님은 '국정농단'에 대한 주제를 꺼낸 적이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다며 헤이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와 헤이미는 동시에 동공 지진이 났다. 이런 주제가 몰타 어학원 수업시간에 나오게 될지 꿈에도 몰랐고, 어떻게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현기증이 납니다.... 선생님!
2018년 4월 27일은 상징적인 날이었다.
숙소 내 방에서는 와이파이 신호가 약했고, 데이터는 아껴서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 생중계며 동영상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다음날인 4월 28일에 콜롬비아 리더가 주최하는 골든베이 (Golden bay) 투어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몰타에 있는 여러 명의 남미(콜롬비아, 브라질, 칠레 등)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도중에 갑자기 힐리가 나를 보면서 물어봤다.
"너 어제 남북정상회담 뉴스 봤어?"
힐리가 나에게 관심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몰랐다. 근데 더욱 당황했던 건 힐리가 그 질문을 하자마다 일제히 나한테 시선이 쏠렸다. 나는 뉴스 기사밖에 못 봤다고 대충 얼버무렸는데 힐리가 오히려 나한테 꼭 보라고 일러줬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였다. 뭔가 한국인으로서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 큰 아쉬움이 남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질문해준 힐리가 너무 고마웠다.
나는 일본을 무조건 적으로 좋아하는 것 아니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더불어 일본 사람 모두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밑밥 까는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각각의 클래스 문이 잠겨 있다. 각 담당 선생님들이 열쇠를 챙겨 와서 열어야지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학원에 도착하면 레저 룸에 가 있거나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복도에서 기다리면서 다른 클래스의 한국인 언니와 잠깐 대화를 나누다가 그 언니의 같은 반 친구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게 됐다. 그 친구는 인사를 한 후 계단에 앉아 자신의 태블릿 PC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친구의 태블릿 PC를 보게 됐는데 물질을 하고 있는 제주 해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너무도 반가워서 이거 한국 제주 해녀라고 얘기해줬다. 그런데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건 일본 문화인데?"
나는 얼굴이 굳었다. 내가 한국인 언니한테 이 친구가 한국의 해녀와 일본의 아마를 혼동하는 거 같다고 이야기해준 다음 다시 한국 해녀가 확실하다고 일러줬다. 하지만 그 외국인 친구는 안하무인이었다. 한국인이 직접 정정해서 설명을 해주는데도 고집 피우듯 일본문화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칫하면 설전을 벌일 뻔했다. 때마침 선생님이 오셔서 교실 문을 열어주셨는데, 조금이라도 늦게 오셨다면 대소동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이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모습 때문에 한동안 얼이 빠져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살다 보면 저절로 알려지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외국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간혹 나의 영어 말하기 실력이 서툴러서 의미가 잘못 전달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사실과 다른 이미지를 심어주게 될까 봐 모든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나의 모든 행동이 외국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새로운 장소에 가서 마음을 연다는 건 그만큼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알아보려 하는 의지와 들으려 하는 귀가 필요했고, 나 또는 우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한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것이 해외에 나갈 때 필요한 첫 번째 준비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