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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H Nov 16. 2021

이럴 거면 하지 마

답정너 천재들


부서가 쉴 틈 없이 바쁠 때는 형식적인 주간보고 외에는 다 같이 둘러앉아서 회의할 시간조차 없어요.

 

그런데 전반적인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틈만 나면 회의실에 모여서 매번 다른 안건을 가지고 탁상공론의 장이 펼쳐져요. 이전에 말했던 아이디어들만 모아도 새로운 방향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을 텐데 뭘 그렇게 자꾸 창조적인 의견을 내보라고 하는지... 


퇴근하면서도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같은 업종 다른 회사 신제품과 새로운 프로모션을 살펴보고 있거나 집 근처에 있는 타 브랜드 매장에 가서 기웃거렸어요. 심지어 꿈속에서도 계속 일하고 있어서 자고 일어나도 개운치 않는 것이 만성적인 피로에 치여 살았어요.


뭐... 퇴근해서는 직장인 모드는 꺼둬야 하는데 그 균형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제 탓이 크겠죠?


어쨌든 어김없이 약속된 회의시간이 다가왔고, 다들 업무 노트에 끄적인 아이디어가 뜬금없더라도 터뜨려주기를 바라면서 회의실로 들어가요. 그렇게 상사의 기분을 살펴가며 끄적여놓은 노트에만 시선을 두고 개미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요즘 시장의 동향을 살펴봤을 때... 이러이러하고 이러... 그러니까... 제 말의 요점은..."


말이 되든 안되든 무조건 의견을 내라 해서 말은 했지만 중간에 말도 끊고 심지어 생각은 하면서 말하는 거냐고 대차게 까여요. 분명 최근에 업데이트된 통계청 자료와 각종 뉴스 기사, 그리고 탑을 찍고 있는 타 브랜드의 움직임, 구매자의 평 등, 생각 무지하게 하고 꼼꼼히 따져보고 얘기한 거 같은데 돌아오는 건 핀잔밖에 없어요. 


이럴 거면 그냥 벽 보고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시지 왜 시켜놓고 딴소리를 하실까요?


그렇게 다른 팀원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흠뻑 받고 회의실을 나오게 되는데 점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해요. 엄청난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욕을 먹으면서 까일 일인가 싶을 정도로 당황함에 분노 게이지가 상승해 버립니다.


그 정도로 끝내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뒤끝 있는 상사는 본인이 원하는 답의 기사들과 누군가의 인터뷰, 그리고 타 브랜드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을 부서 단체 채팅방에 던져놓고 이런 생각을 못하냐면서 돌려 까기 시작해요.


저는 정월대보름에 까는 부럼이 아닙니다만?


본인이 원하는 답이 타 브랜드에서 나왔으면 그 회사로 이직하시면 될 거 같은데... 아니면 다른 회사들이 하는 것처럼 상당한 예산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보시든가... 


예산이 쥐꼬리라는 것은 엄청 강조하면서 매출은 몇 배 이상 해주길 바라는 모습이 신입으로서도 얼마나 웃기는지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제 생각이 지극히 논픽션이었고 오히려 저예산 신화창조를 바라는 임원분들이 엄청난 판타지를 꿈꾸고 있는 듯해 보였어요.


정해진 답이 없는 일에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억지로 욱여넣고 박박 욱일 때면 과거의 모든 일이 파노라마처럼 뇌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요.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이렇게 답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팔자 탓 이름 탓을 하면서 개명을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도 했던 거 같아요.


회사생활이 정답이 있는 수능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아니고 수학처럼 정해진 공식에 따라 풀어나가는 것도 아니니... 


제발 이미 답을 정해놓고 질문하지 마세요. 


원하는 답은 본인 마음속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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