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들어간 떡볶이를 파는 식당
오늘은 태국 공장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 유난히 느긋한 하루였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다섯 시. 허기가 지긴 했지만, 뭘 먹을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익숙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식이 생각났다. 낯선 나라에 오래 머물다 보면 고향의 맛이 더 자주 생각난다. 한국 음식이 이렇게 간절하게 떠오를 줄이야.
구글맵을 켜고 근처 한식당을 검색했는데, 놀랍게도 10미터 앞에 있었다. 여긴 태국 시라차, 한국 사람도 드문 이 조용한 도시에… 한식당이 바로 코앞에 있다니. 이건 기적이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도시다)
기대감을 안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흔한 태국 길거리 식당과는 다르게 실내는 시원하고 깔끔했다. 문을 열자마자 주인분이 “사와디캅” 하며 인사를 건네셨다. 나도 어색하게 따라 인사를 했다. 내가 태국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금세 인사는 영어로 바뀌었다.
사장님은 메뉴판을 건네며 자신이 개발한 한국 메뉴들과 신메뉴인 치킨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셨다.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치즈떡볶이는 있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물으셨다. “한국에서 왔어요.”하자, 정말 깜짝 놀라시며
여기 식당이 4년 됐는데 한국인은 처음이에요!
라고 하셨다.
그런 나에게 한국 음식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음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치즈떡볶이 하나, 그리고 치킨라이스를 주문했더니, 잠시 후 작은 그릇들이 하나둘 테이블에 더해졌다. 서비스라며 내어주신 김치찌개와 간장치킨. 간장치킨은 새로 개발한 레시피라고 했다. 한 번 맛을 봐달라며 내미는 손끝에서, 그동안 이 메뉴에 쏟았을 고민과 애정이 묻어났다. 김치찌개는 “한국인 입맛에 맞을까?” 하는 호기심이 섞여 있는 눈치였다. 괜히 마음이 찡했다.
밥을 먹고 있는 내내, 사장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올해 서른둘.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시라차에 한국 음식점이 전혀 없다는 걸 발견하곤, 그 틈을 기회로 삼아 창업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단 한 번도 한국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의 맛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도, 이 식당을 운영해오고 계신 거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그럼… 대체 어떤 맛일까?’ 걱정이 스르르 밀려왔다. 그렇게 살짝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던 찰나, 간장치킨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모든 걱정은 치킨을 한 입 베어 문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닭껍질은 놀라울 만큼 바삭했고, 양념은 아낌없이 고루 발라져 있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든 느낌이 났다. 마치 교촌 레드 맛 같기도 했다. 그동안 태국에서 먹었던 어떤 치킨보다도 ‘한국의 맛’에 가까웠다. 입 안에서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괜한 감동이 밀려왔다.
김치찌개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동안 해외에서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항상 아쉬웠다. 기름이 둥둥 떠 있거나, 지나치게 짜거나, 어쩔 땐 달기까지 했다.(!!!) 심지어 싱거운 맛도 많았고. 그런데 이 김치찌개는 얼큰하고 담백했다. 한 번도 한국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만든 음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가장 기대했던 메뉴, 떡볶이. 비주얼부터 조금 낯설었다. 치즈가 뿌려진 붉은 소스 위로, 낯선 향이 피어올랐다. 한 입 먹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고수와 떡의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전형적인 한국식 치즈떡볶이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끌리는 맛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엔 한국 떡볶이에 대한 갈증이 남았다. 결국, 실례를 무릅쓰고 사장님께 엽떡 레시피를 전해드렸다. 사장님은 고맙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레시피를 살펴보셨다. 직접 한국인이 와서 음식을 먹고, 진심으로 맛있다고 해주니 오히려 자신이 더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셨다.
식사를 거의 마칠 즈음, 사장님이 다시 다가오셨다. 손에는 조그만 소스 통 세 개가 들려 있었다.
이거, 제가 직접 만든 소스예요. 한 번 맛보세요.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치킨에 곁들이는 소스라고 했다. 하나는 칠리마요, 하나는 랜치, 그리고 마지막은 허니머스터드. 각각의 맛을 보며 깜짝 놀랐다. 정교한 밸런스와 깔끔한 뒷맛이 느껴졌다. 그냥 시판 소스를 따라 한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레시피를 다듬고 또 다듬었구나 싶었다.
그러다 사장님이 말을 꺼내셨다.
“저희 교수님이 미국 분이셨어요. 랜치 소스를 좋아하셨는데, 태국 사람들은 그거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사장님은 태국 사람들에게 낯선 맛을 낯익게 만들기 위해, 그는 다시 손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했을 테다. 레시피를 직접 개발한다는 건, 단순히 요리를 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애정과 끈기, 자존심이 녹아든 결과물. 나는 그 모든 노력이 담긴 소스를 조심스레 다시 한번 찍어먹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이 'in chon'이잖아요? 혹시 인천이랑 관련 있는 거예요?”
사장님이 활짝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맞아요! 한국의 인천도 뜻하고요. 여기가 촌부리(Chonburi)잖아요. 그래서 in Chonburi—In Chon이에요.”
그 말 끝에 사장님은 조심스레 덧붙이셨다.
언젠가는 꼭 한국에 가보고 싶어요. 진짜 한국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싶기도 하고…
새로운 한국음식도 태국 스타일로 개발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괜히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를 동경하며, 그 나라의 음식을 사랑하고, 또 그 맛을 사람들과 나누는 삶. 그 마음 하나로 이 식당을 4년 동안이나 지켜온 사람이 바로 이 앞에 서 있었다.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치긴 아쉬운데…’
나는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블로그를 하는데, 혹시… 같이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사장님은 놀란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금세 환하게 웃으셨다. “그럼요! 너무 좋아요.”
나는 이렇게 낯선 나라에 와서,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하루를 보내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참 좋다. 타인의 일상 속에 살짝 발을 담그는 일, 그 안에서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순간을 만나는 일. 그게 내가 여행을 계속하게 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장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끝으로, 오늘의 기록을 조용히 마무리한다.
이 하루가 오래도록 따뜻하게 기억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