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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안이 복지인 회사

회사에서 두리안 파티가 열렸다

by 에밀리
두리안 파티에 참여할래?
네? 그게 뭔데요?


전날 어렴풋하게 사람들이 '두리안 파티' 라고 한 것 같긴 한데 대체 그게 뭔지 몰라 그냥 웃어 넘겼더니, 오늘 밥을 먹고 돌아오니 직원 하나가 두리안 10여개를 트렁크에서 꺼내며 낑낑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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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안을 나르는 회사 사람들


와... 두리안이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두리안 옮기는걸 도와드리려고 다가가서 가장 큰 두리안을 하나 집어들었는데 손잡이없는 5키로 케틀밸을 든 느낌이었다. 심지어 손으로 두리안을 받치자 딱딱하고 뾰족뾰족한 껍질이 나를 따갑게 찔러왔다.


1.HEIC 두리안은 딱딱하고 무겁다

그리고 두리안을 나르고 2시간 후, 부장님 중 한 분이 나를 부르셨다.


에밀리! 두리안 먹어봤어?


드디어 때가 왔구나...


사람들에겐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난 두리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동남아에서만 인생의 1/3을 산 사람인데 두리안을 못 봤을 리가 없다.


아버지는 싱가폴에 유학가있던 나를 찾아올때마다 두리안을 잔뜩 먹었고 그때마다 우리 집안에서는 두리안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 냄새가 싫었는지, 아버지가 나에게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하는것이 싫었는지 두리안은 결코 먹지 않았다.


회도 마찬가지다. 어렸을땐 억지로 먹는게 싫어 절대 안먹었던 회를 스무살 넘어서야 잘 먹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먹은 오도로 덕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난 그냥 아버지의 강요가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난 두리안을 여기서 생전 처음 먹어보는거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거라고.


그러자 그렇게나 먹기 싫던 두리안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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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스틴도 있었다


두리안을 먹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각을 바꾸니 그렇게 거부감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두리안의 냄새는 나에게 사춘기의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향기로 다가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리안을 두 통을 비우고 있었다. (하나를 다 먹으니 직원분이 맛이 다르다면서 하나 더 줬다)


두리안의 맛은 정말 고소했다. 비교하자면 아보카도는 많이들 먹어봤을테니 조금 단 아보카도를 먹는 맛이라고 하자.


나는 항상 센드위치에 아보카도를 넣어먹는 사람으로써 두리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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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 두리안
원래 두리안 한통 사려면 700바트정도 하는데
이번엔 500바트(21000원) 밖에 안들었어!

부장님은 두리안이 싸졌다며 마음껏 먹으라고 하셨다.


두리안은 과일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비싼 과일이다.

어른 주먹만한 망고 1kg가 50밧(2000원) 정도 하는데 두리안은 2~3kg가 21000원이니 일반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살 엄두도 못내는 사치품이다. (태국의 평균 월급은 64만원이다)


그런데 이런 두리안을 회사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 있다니.

이것도 하나의 복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슬슬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내 옆자리 상사분께 두리안을 전달하라는 미션이 생겼다.

9.HEIC 두리안 전달 미션 수행중...

내 옆자리 상사는 두리안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상사님의 아버지는 두리안을 좋아하시는데 어머니는 아예 못먹는다나.

우리 가족과 비슷해서 공감이 갔다.


그러게, 뭐가 그렇게 싫어서 20년을 피하고 살았을까.

아버지는 그저 나에게 맛있는걸 먹이고 싶으셨을 뿐인 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건, 아버지가 억지로 권하던 그 시절의 두리안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두리안이라는 생각.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이 열려 있었던 것뿐이라는 이유로 두리안을 맛있게 먹는 나.


인생에서 다시 만나는 것들이 있다. 예전엔 도저히 못 견디겠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그런 순간들.


두리안 하나 앞에 앉아 그걸 씹고 삼키며 나는 그걸 조금 이해한 것 같다.


이 이상한 냄새 가득한 과일 덕분에 조금 더 나 자신과 가까워진 기분이다.

다음에 누가 물어보면, 나도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두리안 파티에 참여할래?

응, 나 두리안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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