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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어를 모르면 일어나는
낭만적인 일

태국 소도시의 사소한 재미

by 에밀리

태국에서 빨래 건조를 돌렸는데

28분만 기다리면 된다고 한다.


태국의 대학가 빨래방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다시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은 괜히 번거롭게 느껴졌기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행히도 코너를 돌자 작은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용하고 약간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그 카페에 들어서며 나는 잠시 마음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메뉴판을 본 순간 난 당황할 수 박에 없었다.


아뿔싸. 전부 태국어였다.


외국인이 자주 오는 동네가 아니다 보니 영어 메뉴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더 난감했던 건, 내 휴대폰이 이미 배터리 0%로 꺼진 지 오래였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 자리에 앉았으면 음료는 하나 주문해야 했고, 나는 그 메뉴판을 앞에 두고 막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직원분은 나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채셨는지 조심스럽게 카운터 밖으로 나와 메뉴를 하나하나 가리켜 주셨다. 그 눈빛은 확실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언어는 우리 사이를 쉽사리 이어주지 않았다.


메뉴판은 여전히 낯선 기호들로 가득했고, 일부 메뉴엔 그림조차 없었다. 그래, 누가 아메리카노나 녹차같은 기본적인 메뉴에 사진까지 걸어놓겠는가.


그래도 왠지 레몬에이드는 있지 않을까, 싶어 용기를 내어 "레몬에이드!"라고 외쳤지만, 돌아온 건 직원의 고개 갸웃임이었다.


사진이 있는 메뉴는 죄다 프라페였고, 방금 식사를 마친 나로선 그 진한 음료들이 전혀 끌리지 않았다. 차라리 생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재밌잖아?


그렇다. 미친 초 긍정인인 나는 이 상황마저도 재밌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니. 이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작은 렌덤박스가 아닐까? 웬만한 것들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늘 같은 일상 속에서 이런 우연한 혼돈이 끼어드는 일은 설렌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림에 있는 에이드처럼 생긴 무언가를 근거로 주변의 아무 메뉴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게 어떤 글자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거 주세요


마치 예전 뽑기통에 손을 넣어 작은 플라스틱 캡슐을 꺼내던 그 시절처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그 짧은 순간이 괜히 설레었다. 그때의 두근거림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요즘은 기술이 너무 발전되어 뭐든 너무 투명하고 미리 알 수 있게 되어버렸지만, 이건 그야말로 진짜 '랜덤뽑기'였다. 그렇게 나는 의외의 기대감을 안고, 이름도 모르는 음료를 기다리게 됐다...


아무런 정보 없이 주문을 던져놓는 그 낯설고 두근거리는 감정이 꽤 유쾌했다.


그리고 곧 빨간 시럽이 들어간 에이드 한 잔이 내 앞에 놓였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목이 말랐던 탓에 시원하게 잘 넘어갔다.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예상하며 산다. 이름도 맛도 알고 있는 것들로 하루를 채운다. 하지만 때때로, 모르는 것 하나가 가져오는 무작위성 속에서 더 생생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런 순간들이 어쩌면 우리가 매일 뽑는 작고 사소한 로또 같은 건 아닐까.


오늘의 음료는 무슨 맛이었을까? (딸기맛 같기도 하고 베리류 같기도 했다)


여전히 잘 모르지만, 그게 뭐 어떤가. 중요한 건 오늘은 그 무작위성이 나를 기쁘게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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