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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B Apr 23. 2022

룰을 깨고 변화를 받아 들이는 자세

시간이 뭣이 그리 중한디


요즘 나는 정해놓은 룰을 하나씩 깨면서 살고 있다. 우선 밤 10시에 꼭 자야 했던 룰을 깼다. 새벽 1-2시까지 안 자고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구석진 곳에  들어가 나오지 못해 칭얼거리는 나이 많은 반려견 순이와 자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 5시 기상을 포기하고 그 대신 늦은 밤에 깨어 있기로 했다.


밤 12시, 새벽 1시에 깨어 있어 본 적이 거의 없던 나에게 그 시간은 기억에 없는 죽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순이 때문에 일어나 있는 이 시간이 고요함과 차분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이 시간대는 오늘의 걱정과 피로는 과거가 되고 새로운 날이 기대되는 교차로 같은 느낌이 든다.


식사  바로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룰도 깼다. 결혼초에 형님(남편의 누나) 같이  적이 다. 인턴 생활을 하던 나는 이른 아침 출근 전에 먹었던 밥그릇에 아무 생각 없이 물만 부어놓고 나온 적이 한번 있었다.  나보다 윗 사람인 형님과 같이 살면서 물만 부어 놓고 나온 밥그릇은 부적절하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두고 나온 그릇의 설거지를 형님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만 여겼던 나의 실수 이후  설거지는 식사 후 바로 즉시 하는 것이 룰이 되었다.


하지만 그 룰을 최근에는 지키지 않고 있다. 퇴근 후 피곤할 때도 있고, 내 맘대로 해도 되는 나의 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이유에서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수를 한 후 하루 중 최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에 설거지를 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읽던 책을 읽기도 하고, 보고 싶은 '김미경의 북 드라마'를 시청하기도 한다. 그런 후 잠깐 졸리는 시간이 찾아올 때 그때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간다. 잠을 쫓아내는데 설거지는 효과 만점이다.


살면서 우리가 정해놓은 룰들이 많다. 지키지 않아도 아무 지장이 없는 것들이 많은데도 우리는 꼭 그걸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하루 세 끼, 그것도 꼭 밥으로 먹으라고 전화할 때마다 신신당부하신다. 그것도 엄마에겐 일종의 룰인 셈이다. 난 그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아침은 커피가 나의 식사이다. 엄마가 알면 놀라시겠지만 우리 집 쌀은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깨고 싶은 룰이 한 가지 더 있다. 일 년에 두 번 시부모님의 기제사가 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에 불만을 느껴본 적이 없다. 제사 음식을 형님과 같이 준비하고 같이 식사하는 것도 즐겁다. 그런데 밤 12시가 넘어 지내고 있는 제사는  왜 꼭 자정이 넘어서 지내야  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제사를 다 지낸 후 정리가 끝나고 자는 시간은 보통 새벽 2시, 형님은 출근의 부담을 가지고 있는 나를 위해 뒷정리를 해주시고 먼저 자라고 배려를 해주신다. 하지만 자정이 넘어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형님과 남편에 대한 반란의 깃발이 해가 갈수록 마음속에서 조금씩 휘날린다.


제사를 지내는 마음은 정성과 성의가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매번 자정이 넘어 지내는 제사는 기도하는 경건한 마음이 되다가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져 차오르는 불만을 꾹꾹 누르고 지낼 때가 많다. 기제사는 돌아가신 전날에 음식을 준비하여 밤 12시가 넘은 첫 시간에 지낸다는 원칙을 남편은 아직 고수한다. 그리고 조상은 밤 12시가 넘어 제삿밥 먹으러 온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제사를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자정 넘어 지내는 의식 자체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면서 추억을 같이 회상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준비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밤 12시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적당한 시간에 미리 제사를 지내는 것이 변화가 빠른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집의 제사의식은  세상의 속도에 비해 너무 뒤처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 며느리의 입장이라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제사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정성을 담아 준비한 음식을 차려 마음으로 지내는 제사야말로 돌아가신 부모님도 바라는 바가 아닐까.  


바꾸기는 어려워도 한번 바꾸면 고정관념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했던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조금 앞당겨 지낼 수 있는 제사 룰을 새로 만들어 가족이 모여 즐겁게 식사할 수 있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결혼 전에 돌아가셔서 뵙지 못한 시부모님이 어떤 분들이며 어떤 추억들을 남편과 형님은 가지고 있는지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을 제삿밥을 먹으며 충분히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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