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교수들의 음악 취향
수술방의 분위기는 집도의(operator)가 결정한다. 각 집도의마다 본인의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방은 잡담도 할 정도로 편안한 반면 어떤 방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엄숙하다. 과별로 또 다르다. 우리 병원 외과 교수님들은 대부분 음악을 튼다. 음악도 각 교수님마다 취향이 다르다.
존경하는 한 유방외과 교수님은 수술장에서 항상 클래식음악을 트셨다. 수술 중에 bovie(전기 절삭 기구)를 사용하면 삐-삐- 소리가 나는데 교수님은 항상 그 기계의 소리를 줄이라고 하셨다. 그날은 교수님께서 특히 좋아하시는 Grieg 피아노 협주곡 A minor가 울려 퍼졌다.
"Bovie 소리 줄여라. 음악 감상에 방해가 되잖아."라고 수술방 간호사에게 지시하셨다.
수술기구들은 곧바로 음소거가 되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며 무음수술을 진행했다. 너무 음악소리가 아름다운 나머지 껌뻑껌뻑 졸고 있었다.
여자 노래만 틀어달라고 요청하는 교수님들을 꽤 많이 봤다. 본과 3학년 학생실습 때 한 교수님 수술방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수술방에서 오렌지캬라멜의 Lipstick이 울려 퍼졌다. 워낙에 흥겨운 곡이라 수술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렸다. 교수님께서는 "오렌지캬라멜 아니?"라고 물어보셨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이라고 하시면서,
"나 팬클럽도 가입했잖아~"라고 수줍게 말씀하셨다.
큰 수술을 하는 엄숙한 대학병원의 위엄 있는 교수가 아이돌의 팬클럽까지 가입하다니...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대 교수"의 환상을 깨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냥 남들이 멋대로 만든 고정관념(stereotype)일 뿐이고 의대 교수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순수한 마음은 곧 positive energy로 돌아오고 삶에 활력이 생긴다. 나 역시 덕후 기질이 있기 때문에 교수님께 충분히 공감했다. 그런데 그 곡이 끝나고 이어서 같은 곡의 MR이 수술장에 울렸다. 아. 앨범을 통째로 듣고 계시나 보다.
진정한 찐팬이시다.
한 혈관외과 교수님께서는 약 10년 동안 수술방에서 같은 playlist를 들으신다. 가끔씩 곡이 추가가 되기는 하지만 곡이 빠지는 일은 없다. 올드팝, 특히 Celine Dion의 Beauty and the Beast를 가장 좋아하신다. 2018년 12월, 혈관외과 치프를 돌고 있었을 때였다. 펠로우 선생님을 도와 수술방에서 환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아름다운 선율의 바이올린 소리가 감미로운 목소리와 함께 들렸다.
"아! 이거 Celine Dion의 To Love You More 아니에요?" 수술방 간호사들에게 내가 물어봤다. 나도 Celine Dion을 엄청 좋아해서 명곡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자 흥얼거렸다. "여기 수술방 들어오면 명곡들이 많아서 정말 좋아요."
"선생님은 1년에 1달만 바스(Vascular, 혈관외과) 치프로 오셔서 신선하시겠죠," 수술장 간호사샘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매일매일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는 우리는 질려서 노이로제 걸려요." 펠로우 선생님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셨다.
"10년째 듣고 있는 저는 오죽하겠어요," 오랜 기간 혈관외과 수술장 보조를 하고 있던 전문간호사 선생님이 허탈한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10년째 같은 노래는 좀 심했다. 그리고 그 1달 동안 수술방 치프를 하면서 나 역시 playlist를 전부 외우게 되었다.
그래도 그 지겹던 노래가 치프를 살린 경우도 있다!
다른 전공의가 혈관외과 치프를 돌고 있었을 때의 일화다. 신장이식 수술은 공여자 신장을 비뇨기과에서 적출하면 그 콩팥의 혈관을 수혜자의 혈관에 이어 붙인다. 동맥은 동맥끼리, 정맥은 정맥끼리. 마지막으로 요관을 방광에 이어준다. 거의 혈관 수술이다. 그래서 이식혈관외과라고도 불린다.
혈관은 아주 가느다란 실로 꿰매는데 교수님께서 바늘을 통과시키면 치프 전공의가 tie(매듭)를 한다. 평소처럼 교수님께서 tie를 하라고 치프에게 실을 넘겼고 그날따라 집중력이 떨어졌던 치프는 힘을 너무 세게 줘서 실이 끊어져버렸다!
"아니--!!"
때마침 그 순간, 교수님의 최애곡인 Beauty and the Beast의 전주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너 임ㅁ-- 흐음음흠♫"
평소 너무나도 좋아하시는 멜로디가 나오자 분노를 잊고 흥얼거리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시 바늘을 달라고 손짓하시며 suture(봉합)를 다시 시행하셨다. 이번에는 치프에게 tie를 맡기지 않고 흥얼거리시며 직접 tie를 하셨다.
이 일화는 '어휴 그때 혼날 뻔했어'라며 치프들끼리 공유되었다.
음악 관련 일화들은 너무 많아서 한 글에 다 담기가 어렵다.
어쨌거나 집도의는 자기가 가장 편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수술의 결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