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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경 Jul 20. 2024

아플 때 쓰는 기록

하루일글

어제 병원 정기 진료를 다녀오다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암 경험자의 심리사회적 지지를 위한 고잉 온 다이어리 전시회’ 앞에 섰어요. 거기에는 치료 과정 동안 담은 사진과 3줄짜리 일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전시회 속 사람들의 기록을 보다 보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아픈 사람에게 기록할 정신이 있나?’

네,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24시간 내내 절망에 빠져있는 건 아닙니다. 절망 속에서도 웃기도 하고, 밥을 맛있게 먹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오히려 아프기 때문에 감정을 발견하는 예민함이 발동되는 것 같기도 해요. 여기서 예민하다는 건 뭔가를 명민하게 발견하는 감각 같은 것을 말합니다.


아프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현재 가지지 못하는 감각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아프다는 건,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시간을 가지도록 일부러 부여된 시간과도 같겠습니다. 희망이 절실해서 희망이 보이고요, 아픔이 없는 시간(혹은 아픔을 잠시 까먹은 시간)이 귀중해서 바스러뜨리고 싶지 않기에 귀하게 다룹니다. 배 채우려고 먹는 일상의 식사가 당연하지 않음을 알아서 눈물 나고요. 커피 마시는 시간 혹은 그 자체의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아서 그 시간만을 기다리고는 합니다. ‘언제 무너져 버릴지 몰라’라는 책을 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귀중한 시간-순간을 발견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아플 때에 더욱 글이 잘 나왔던 것도 같네요. (암 경험자는 아니고, 희귀질환으로 투병하였습니다.) 느끼는 감정이 하나하나 소중해서, 꺼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것이 글 쓰는 데에 위험한 독과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것이 왜 독인지 말하지 못해 아쉽네요. 아픔으로 인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평소와 다르게 과하게 느끼는 게 아니거든요. 그저 깨끗하게 느껴지는 일인 걸요. 그리고 이후 아프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감정이 다시 겹치고 겹쳐 회오리 치더라도, 아팠을 때 감정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느낀 덕에 덜 헷갈립니다.


걷지 못해서, 영영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안은 일상에서 명확하게 아픔과 기쁨과 슬픔과 우울과 희망과 기쁨과 절망과 속상함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느끼고 기록했었는데요. 그때 기록을 해두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나, 지금도 안도 섞인 숨을 쉽니다. 최근 읽은 트라우마 관련한 책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가 겪는 문제가 ’해리‘라면, 치료의 목표는 ’결합이다‘. 즉 따로 떨어진 트라우마 기억의 조각을 계속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로 통합시킴으로써 뇌가 ‘그건 예전 일이고 이건 지금 일어난 일‘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기록해 둔 적이 있는데요. 병원에서 전시를 보고 난 후 이 문장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트라우마, 해리 뭐 이런 걸 다 떠나서 ‘몸이 인지하는 기억’ ‘고통스럽다고 느낄 일’ 등을 삶으로 물들이게 하려면 그것을 꺼내놓아야 하는 거더라고요. 대화가 됐든, 글이 됐든, 혼잣말이 됐든. 내가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하는 노력을 인지하는 것, 기억하는 것, 경외하는 것. 이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고, 외면하는 게 더 쉬운 길이라 판단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픈 사람이든 아프지 않은 사람이든. 그런데 아파본 사람으로서는 감히 말하자면, 외면하지 못해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거예요. 입원생활 동안 가장 많이 말을 하는 사람은 ‘환자‘입니다. 아프다고 말을 해야 낫거든요. 기분이든 고통이든. 저는 쓰는 걸 택한 것뿐이고요. 아팠던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이 저에게는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라서, 더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미래를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택한 시도.


지금 와서는 ‘걷지 못할 수도 있는 병을 치료하던 기간’으로 뭉뚱그러져 뇌의 한 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요. 그때는 사실 그게 삶의 전부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드라마 한 편이 끝난 것일 뿐이더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인상 깊게 봤던 드라마를 다시 보면 반가운 것처럼, 기록해 둔 입원 일지를 보면 반갑고 솔직히 말하면 재미있습니다. 가끔 예전 증상들이 나타나면 지혜를 찾아낼 수 있는 좌표가 있다는 생각에 든든하기도 하고요.


치료를 받는 도중인 분들의 이야기를 보니 ’언제 무너져 버릴지 몰라‘를 쓰게 했던 마음이 떠올라서 써보았습니다. 길어졌네요.


”저는 자가면역뇌염으로 추정하여 치료를 받았고요. 치료 과정을 담아둔 기록물 ‘언제 무너져 버릴지 몰라‘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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