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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쌤 Dec 26. 2020

오래된 피아노와 이별하며

미안해 엄마

이사 날짜가 다가오니 하나 둘 짐 정리를 한다.

첫째가 배속에 있을 때 들어온 이 집에 10년이 넘게 살았으니 나에게는 20년 산 서울 생활의 절반을 보낸 고향 같은 곳이다.

그런데도 뭔가 모르게 이 곳은 낯설다. 

친척도 가족도 하나 없는 이곳에 덩그러니 놓인 느낌으로 학교와 집만 오갔다.

딱히 이웃이랄 것도 친구랄 것도 없이 친정 언니와도 같은 지일 언니의 도움과 사랑으로 근근이 지켜내 온 시절이다. 

그동안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나고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다니고 또 큰 아이는 이제 사춘기가 찾아올 만큼 컸다.

하나씩 정리하며 버리며 추억을 곱씹어본다.


10여 년을 살았으니 데리고 갈 물건이 하나도 없다.

이삿짐 견적을 받으러 온 아저씨에게 다 버리고 간다고, 가지고 갈 게 몇 개 없다고 하니

'로또 맞으셨어요?'라고 물으신다.


물건을 많이 사지도 않고 바꾸지도 않는 사람이니 결혼 때 산 물건들이 이제야 하나씩 정리되는 중이다.

책장 속에서 보지도 않는 전공 서적과 늘 다짐하며 마련한 영어책, 요리책 등등도 정리한다.


매 주말 20L 쓰레기봉투 5-6개씩 버리는데도 뭐가 이리 많은지.


그중, 92년도에 산 나의 오래된 피아노가 고민이다.

사실 치지 않는다.

큰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기는 했지만 공동주택에 사는데 아무 때나 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이는 따로 전자 건반을 이용하는 중이다.


오래 사용하지 않아 조율도 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 아빠가 정말 큰 맘먹고 사 주신 피아노를 쉽게 버릴 수가 없다.

나의 아쉬움보다 엄마의 추억을, 그 기억을 버리기가 쉽지가 않아서이다.


며칠을 고심하다 엄마에게 먼저 말했다.

'엄마, 이번에 이사 갈 때 피아노를 아무래도 가지고 가기가 어렵겠어'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지만 엄마에게 말을 꺼내기까지 쉽지가 않았다.


그 피아노에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 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내어 준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이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10살의 내가 피아노를 연습하고 엄마가 사준 옷을 입고(생각해보면 그때도 우리 엄마는 나에게 턱시도 같은 바지 정장을 사주신 듯) 대회에 출전해 누구나 받는 트로피를 통해 아이가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아도 나는 현실적인 이유들을 대며 이 피아노를 팔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도 한 참을 알아보지 못했다. 

선뜻 어딘가에 전화해 이 피아노를 얼마에 팔 수 있나요?라고 묻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이 피아노가 너무나 고물 취급받으며 헐값에 팔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연결이 되었고 아저씨가 피아노의 상태를 보더니 이 정도면 상태가 좋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흠을 대며 물건의 가치를 떨어트리려 하지 않아 안심이다.

가격이 결정되고 피아노가 떠나간다.


피아노가 떠난 자리에 몇 해 묵은 먼지가 뿌옇게 드러난다.


내 마음속도 몇 해 묵은 먼지가 쌓인 것처럼 말끔하지 않다.


잘 가거라, 더 필요한 곳에서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이 떠나가는구나.


이제 나는 엄마로서 그 맘 때의 나에게 엄마가 그랬듯이 새로운 피아노를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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