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따르는 그림자

by 텅빈글방

융의 자서전을 읽다가 내 마음을 깊이 흔든 그림자에 관한 두 번째 일화가 있다.


융은 어느 날 꿈을 꾼다. 낯선 거리, 밤중의 거센 폭풍. 그는 작고 희미한 등불을 들고 두 손으로 감싸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등불이 꺼지느냐, 살아남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뭔가 거대한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돌아본 순간, 그는 무서웠지만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작은 등불을 지켜야 한다고 느낀다.


잠에서 깨어난 융은 그 검은 형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든 등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빛이 크면 클수록, 그림자 또한 커진다.


이 일화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빛은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이상, 사회적으로 환영받는 가치와 모습을 의미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착하고 성실하며 똑똑한 아이로, 강하고 멋진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싫어했던, 감추고 싶었던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은 어디로 갔을까?


겁 많고 소심했던 나.

수업 시간 발표에 심장이 쿵쾅거리던 나.

싸움에 져서 울며 돌아왔던 나.

조용하고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하던 나.

성적인 감정이 부끄럽고 더럽게 느껴졌던 나.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예민했던 나.


이런 나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나는 이런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더 멋진 나’가 되기 위해, ‘이런 나’는 깊은 마음속 어딘가로 밀어냈다.


내가 버린 그 부분들이 바로 ‘그림자’다.


그리고 나는 가끔, 내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건 결국 내가 나의 일부를, 존재로서 아닌 쓰레기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빛을 강하게 추구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선을 추구할수록 악은 더 깊은 곳으로 숨고,

기쁨을 좇을수록 슬픔은 버려진 채 우울로 변해간다.

온화함을 유지할수록 분노는 괴물처럼 마음속에 웅크리고,

강함을 좇을수록 약함은 상처받고 어둠 속에 갇힌다.


우리가 진짜로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멋진 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있는 그대로 ‘지금 살아 있는 나’일지 모른다.


그림자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도 너야."

"나를 버릴수록, 너는 너를 잃어가고 있어."


가끔,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군중 속의 고독처럼 깊어질 때가 있다.

가족과 친구, 사람들과 연결되어있는 듯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공허하다.


그 외로움은 어쩌면,

내가 내 마음 어딘가에 버려둔 나의 한 부분이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나는 이제, 그 신호를 듣고자 한다.

그림자를 부정하는 대신, 천천히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 억눌렀던 생각과 감정이 허용될 때, 그 속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진심으로 경험하고 싶다.


'더 멋진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나’를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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