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우지
몇 달 전, 아는 오빠가 결혼식을 마쳤다.
너무도 행복한 결혼식이었기에 기억에 오랫동안 남았다.
그 오빠와의 첫 만남은 조금 독특했다.
고3 때 입시 시험장에서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서로 같은 클래스였던 정말 신기한 만남이었다.
당시 오빠는 반수를 준비 중이었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후 난 재수를 하면서도 그 오빠와 연을 이어갔고, 모범 답안지를 얻듯 오빠의 입시곡 몇 장을 받았다.
처음에 악보만 봤을 때도 놀랐지만, 곡을 직접 연주하면서 소름이 쫙 돋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 오빠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주변에 광이 비치는 듯했다.
같은 모티브로 시작한 피아노 곡이었는데,
나는 강가에서 물장구치고 놀고 있다면, 오빠의 곡은 파도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왕래하는 듯한 깊이가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 음악을 하는 거구나 싶었다.
자연스레 나는 그 오빠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그 인연이 계속되어 30대 후반인 지금까지도 종종 얼굴을 보고 지냈다.
2024년 1월 말쯤, 오빠는 결혼식에 와준 나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표했고, 마침 우리 동네 근처에서 볼 일이 있으니 밥 한 끼 하자고 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얼마 안 된 상태였는데,
나의 이야기를 쭉 듣더니 갑자기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직업은 다르지만 같은 전공자였다.
사진상으로 나쁘지 않아 보였고, 난 누구라도 빨리 만났어야 했기 때문에 바로 승낙했다.
생각해 보니 이 오빠에게 몇 년 전 내 친구를 소개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보답 같기도 했다.
(한편, 두 사람 다 결혼해서 참 다행이다..)
다음 날,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런데 카톡이 아닌 문자였다.
"안녕하세요, 어제 00이 통해 소개받은 000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000입니다 반가워요~!"
인사를 마치자마자 이렇게 문자가 왔다.
"네 혹시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저는 0요일, 0요일 괜찮아요"
조금 급한감이 있었지만 소개팅이라는 게 원래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가,
덕분에 시간과 약속장소를 빠르게 정할 수 있었다.
다음날, 문자가 또 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어제부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을 가보니 독감이라고 해서 외출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너무ㅠㅠ"
확률은 반반이다.
1. 다중 소개팅
- 다른 여자와의 만남이 조율이 되지 않아 나를 후순위로 미룬 것.
- 그 여자와 잘 되지 않으면 나에게 연락이 올 것.
2. 독감
- 정말로 독감에 걸린 것.
- 그런데 다음 약속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
나름 소개팅 경력자인 나는 첫 번째로 마음이 기울었고, 이렇게 답장했다.
"아 그러시구나,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몸조리 잘하시고 푹 쉬세요~"
"네 저 때문에.. 당일 취소라 너무 죄송합니다"
"아녜요 얼른 회복하세요~"
그리고 정확히 12일 뒤, 그에게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명절 잘 보내셨죠?"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