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1
읽고 싶어 차곡히 쌓아 놓은 책들은 오늘도 책상 위에서, 식탁 옆에서, 아기 매트 위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나를 기다렸습니다. 이들은 책등의 색도 종류도 모두 다 달라요. 어떤 책은 우주를 이야기하고 또 어떤 책은 식물을 이야기하며 다른 책은 문학 자체를 이야기하지요. 흥미진진한 서스펜스도 까만 책등을 보이며 그 사이 빼꼼히 끼여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만 내면 우동 면발처럼 후루룩 읽어질 책들인데 마음 바쁜 엄마인 나는 하루 한두 장만 간신히 읽습니다. 이건 뭐 두 시간도 안 되는 스릴러 영화를 한 컷트씩 보고 있는 셈입니다. 다음 장을 보다가도 '흠, 이런 게 있었나?' 앞으로 다시 FF(fast forward) 감기를 하는 것이지요. 이래서는 스릴러가 스릴러일 수 없습니다. 영화를 분석하는 학도마냥 영화를 컷으로 분석하는 중이지요.
그러던 이틀 전, 두 권의 책을 기프티콘으로 선물 받았습니다. 젊은 작가의 SF 단편 소설집 한 권과 시집 한 권입니다. 책이 먼 서점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시간 동안 틈틈이 책의 얼굴을 상상하며 설렜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의 판형이나 표지, 면지도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심지어 무게까지 말이지요(개인 적으로는 펭귄 북스의 문고판처럼 가볍고 작은 게 좋습니다).
오늘 내 손에 도착한 책 두 권의 얼굴이 예쁩니다. 단편집은 은은한 난색이 가득한 표지에 띠가 둘러져 있고 시집은 꾸밈없는 곤색이예요. 이 두근대는 마음 그대로 술술 읽어나가야 할 텐데요.
어디선가 내 손에 간택되길 기다리며 말갛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책들을 포함해서요.
책을 기다리게만 하는 나쁜 애인이 된 이유는 모두 이제 갓 시금치를 먹을 수 있게 된 우리 아기 때문입니다. 치사하게 이유를 대냐 싶겠지만 정말이지 아기라는 생명은 하루 중 대부분, 아니 100%의 시간 동안 엄마를 필요로 합니다. 매슬로의 '욕구의 5단계' 중 가장 기본적인 욕구, 생리적 욕구의 하나부터 열 가지 엄마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어요. 먹고 싸고 놀고 심지어 잘 때조차도 토닥이는 엄마의 손과 냄새가 필요하니까요. 실로 그런 연유에 저는 책을 진득이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찹쌀떡 군의 배려로 그런 시간이 생기려는 찰나엔 또 금방 해야 할 일들이 생기니까요.
언제쯤이면 가만히 앉아 한 권을 뚝딱 읽어낼 수 있을까요. 흠, 이상하게도 바라던 일인데 상상하니 왠지 조금 아쉬워지기도 합니다. 책을 보는 시간보다 가만히 아가의 눈을 보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지요. 또 그 시간은 분명히 올 것이며 그때엔 내 작은 아기가 이미 나를 덜 필요로 하고 더 성장해 있을 테니까요.
이름이 푸르른 작가의 단편집을 선물한 분은 이런 글을 함께 보냈습니다.
「삶에 더욱더 사랑이 가득하길 바래요」
평소라면 지나쳤을 수도 있을 이 말이 며칠을 제 기억에 머물렀습니다. 요즘 들어 타인에게 건네는 한마디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탓인지 내게 오는 문장에도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보통 삶에 행복이 가득하라는 말을 주로 하지 그 사이에 '사랑'을 넣는 경우는 드뭅니다. 궁금한 마음에 도착한 책 사진을 찍어 보내며 이유를 묻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더 행복한 거 같아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어쩌면 행복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영화 제5원소에서도 지구를 구하기 위한 가장 마지막 요소가 '사랑'아니었던가요. 사랑이 가득한 삶이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힘인걸요.
집안 온 구석구석 나를 기다리는 책은 열 손가락 모자라도록 있지만 그럼 뭐 어때, 하는 기분이 듭니다. 내게 아윤이와의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그들(책)은 우리 아가가 클 시간 동안 날 기다려줄 인내심이 있으니까요.
물론 내 손에 쥐이는 서적을 간간이 읽긴 하겠지만요.
참, 그 문자를 보낸 분은 아이가 세명이나 있습니다.
건네는 단어와 문장으로는 생활의 면면을 부분으로나마 알 수 있을 뿐이지만 전 그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 차있을까, 란 의심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겐 그의 '아윤이'가 세명이나 있는 셈이니까요.
그 무게가 무겁기도 하겠지만 아, 얼마나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인생일까요.
이 밤, 아윤이를 재운 저는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사랑이 더욱더 가득하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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